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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중앙-2007-가을

언어의 조각사 2015. 6. 15. 15:58

 

 

당신의 파업 ··· 정끝별

21세기는 파업으 시대가 아니라고
세계를 바꾸던 파업의 시대는 갔다고 나는 말했다

파업 백 일을 맞아 서울역 광장에서 거리축제를 열던 저녁 택시는 좀체 무악재를 넘지 못했다 금요일이었고 퇴근 시간이었고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저녁 늦게부터 비가 그칠 것이라고 기상 캐스터가 말했다
황사도 좀 씻겨 내리겠다고 택시 운전사가 말했다
너무 막힌다고 나는 말했다

지금은 실업천만이니
아카시아나 파업을 하는 시대라고
아카시아가 꿀을 만들지 않으면 꿀별이 사라지고 꿀별이 사라지면 농산물 대란이 일어날 것이니 파업을 하려면 아카시아쯤은 해야 한다고
얼마 전에는 꿀벌이 파업을 했는데
꿀벌 유충이 곰팡이를 뒤집어쓴 채 줄줄이 죽어나가 꿀벌이 멸종될지 모르고 아카시아 파업도 꿀벌 파업과 연대되어 있을 것이니 파업은 꿀벌이나 하는 거라고 나는 말했다

폐쇄된 직장 앞에서 오지 않는 기자들을 향해 기자회견을 할 때 당신의 명분이 너무 옳은 것이어서
사장 집 앞에서 샌드위치맨이 되어 1인 시위를 할 때 당신의 요구 조건이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낡은 메가폰을 들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다짐할 때 당신의 외침이 너무 오래된 말이어서
당신의 파업은 위험천만이라고 나는 말했다

가다 서다 무악재를 넘어 서울역 광장에 도착했을 때
빗소그이 로커가 목이 마르도록 사막의 갈증을 외칠 때
덜 젖으려는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광장을 빠져나갈 때
축제의 무대가 우산에 가리고 마이크까지 젖어버렸을 때
당신의 파업은 파업 중인 거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밤, 거리 행진을 뒤따르다
손에 든 촛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비를 가리다
기어코 헛발을 내딛고 말았던
삔 발목을 주무르다 택시에 우산을 두고 내렸던

세기의 상현달이 반괄호처럼 먹구름에 꽂혀 있었던
당신의 파업이 늦은 밤이었다





오랜 추파(秋波)
-미당의 눈맞춤으로

덤불숲에 콩자루 쏟듯 출렁이는 시월의 딱새떼 소리가
먼저 낯 붉히다 은근슬쩍 단풍 들어버린 조숙한 잎새가

남몰래 눈 맞춰두고

갈대 끝에 매달린 저녁 흰 별의 기다란 목줄기가
벙근 달빛을 밤새 파고들다 자욱이 지친 새벽안개가

누구보다 좋게 눈 맞춰두고

아침 풀더미에 백지장 되어 드러누운 첫서리 낯빛이
맛든 대춧빛 겨드랑이 속살의 저물녘 물미리가

눈맞춘 델 거듭 어루만지는

백 년 묻은 달걀처럼 고스란히 품이 삭힌
아득한 그 눈빛이





꽃이 피는 시간

가던 길 멈추고 꽃 핀다
잊고 가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한 꽃 품어 꽃 핀다
내내 꽃 피는 꽃차례의 작은 꽃은 빠르고
딱 한 번 꽃 피는 높고 큰 꽃은 느리다
헌 꽃을 댕강 떨궈 흔적 지우는 꽃은 앞이고
헌 꽃을 새 꽃인 양 매달고 있는 꽃은 뒤다
나보다 빨리 피는 꽃은 옛날이고
나보다 늦게 피는 꽃은 내일이다
배를 땅에 묻고 아래서 위로
움푹한 배처럼 안에서 밖으로
꼬르륵 제 딴의 한소끔 밥꽃
백기처럼 들어 올렸다 내리는 일이란
단지 가깝거나 무겁고
다만 짧거나 어둡다
담대한 꽃 냄새
방금 꽃 핀 저 꽃 아직 뜨겁다
피는 꽃이다!
이제 피었으니
가던 길 마저 갈 수 있겠다





붉은 버섯을 보다 ··· 엄원태

얼굴 흰 여자. 붉은 우산 쓰고 서성이는 장맛비 속에 마냥 서 있었다 하필이면 등산로 어귀 휴게소 주차장 구석에······ 여자는 십리 들길을 혼자 걸어 연밭 지나고 포도밭과 과수원을 지나서 왔다고. 이따금 그렇게 서 있다가 홀연히 사라지곤 한다고, 누가 아는 체를 했다

상수리 숲 아래 젖은 낙엽 더미 어깨 들썩이며 한숨쉬는 것 보았다 나뭇잎들의 번들거리는 우울을 눈으로만 매만졌다 능소화는 전봇대처럼 밑둥치만 남은 소나무를 타고 올라 제 한 몸으로 화엄 만다라를 이루었다 그만하면 됐다

산비둘기가 살기 힘들다는 푸념처럼 울었다 나리꽃들은 끝내 묵묵부답. 저마다 자폐증을 앓고 있었다 젖은 공기 탓이었다 누가 긴꼬리제비나비를 봤다고 말했다 다른 누가 불어난 개울을 건너다 징검돌 잘못 디뎌 정강이까지 물에 빠진 직후였다 자귀나무 분홍 꽃술은 어느새 퇴색했지만 그만하면 됐다

하산길에 붉은 버섯을 보았다 떡갈나무 아래 비탈이었던가, 붉은 우산의 그녀가 거기 있었다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이 듯,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듯, 하염없이 허공을 향해 서 있었다

는개처럼 가는 비만 오락가락했다





노래

가설식당 그늘 늙은 개가 하는 일은
온종일 무명 여가수의 흘러간 유행가를 듣는 일
턱까지 땅에 대고 엎드려 가만히 듣고
심심한 듯 벌렁 드러누워 멀뚱멀뚱 듣는다

곡조의 애잔함 부스스 빠지 털에 다 배었다
희끗한 촉모 몇 올까지 마냥 젖었다
진작 목줄에서 놓여났지만, 어슬렁거릴 힘마저 없다
눈곱 낀 눈자위 그렁그렁, 가을 저수지 같다

별다른 할 일 없는 주인아저씨의 일이란
줄기차게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대는 일
한결같은 무명 여가수의 흘러간 유행가 리바이벌

정작, 노래를 틀어대는 주인아저씨보다
곡조의 처연함 제 몸으로 다 받아들인 늙은 개가
저 여가수의 노래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겠다

뼛속까지 사무친다는 게 저런 것이다
저 개는 다음 어느 생에선가 필시 가수로 거듭날 게다
노래가 한 생애를 수술 바늘처럼 꿰뚫었다





그림자 정인(情人)

카루소가 흐르는 나른한 오후
그녀에겐 잠깐씩 다녀가는 정인(征人)이 있다
그는 그림자 사나이, 섀도우 맨

창틈에 난 구멍은 그녀의 블랙홀
벽에 생긴 그림자는 그녀만의 은하수
햇빛이 실어다 준 정인이 거기 있다

철책 무늬 그림자가 만드는 표정을
그녀는 가는 손가락으로 만난다
안녕, 섀도우 맨, 인사하고
엄지와 집게 손가락으로 얼굴을 더듬는다
이건 눈, 이건 오뚝한 콧날,
달리와 달리 훨씬 깜찍한 수염, 이라고 자랑한다
어때요 잘생겼지요? 라고 말하자,
이제 곧 떠날 시간이 되었다

모심(慕心)이 정인을 만들었다, 고······
그리움으로 그림자를 사랑하였노라, 고······

그러나 때로 인색한 구름은 고대 그마저 데려가버리고······
안타까운 그녀는 행여
내일 날이라도 흐릴까, 지레 마음 졸인다





자존심 ··· 김상미

세계지도를 펼친다
서로 죽인 자, 서로 죽임을 당한 자들이 만든
서로 죽이는 자들을 갖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살아남은 자들이 만든
무수히 많은 피의 강을 건너왔지만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피의 강을 건너가야 하는 자들이 만든
지금도 한창 살육이 계속되고 있는
핏물로 뒤덮인 세계지도

그 위에다 나는 쓴다
잘 지내고 있냐고요?
그럼요, 총도 칼도 가진 게 없지만
내게는 아직 힘이 있어요
인간을 믿고 인간을 사랑하는 자존심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가장 아름답다는 인간의 자존심이!





아이스바 사랑

그녀는 나를, 어리디어린 나를 개목걸이에 걸어 창가에 묶어두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빵을 만드는 빵집 아저씨와 세상에서 가장 질기고 아름다운 구두를 만드는 구둣방 아저씨를 번갈아 만나야 했거든요, 사랑은 징벌이야, 우리는 누구도 혼자 살지 못하도록 벌받은 존재들이야, 나는 그녀의 징벌 때문에 날마다 개목걸이에 개처럼 묶여 멍하니 창문 너머 세상을 구경해야 했어요, 매일매일 똑같은, 500원짜리 아이스 바처럼 단순하고 시시콜콜한 나날의 연속이었어요.

참다못한 나는 그녀에게 소리쳤어요, 창문 말고 책을 갖다 달라고, 그러자 그녀는 아아, 채~액! 하면서 아버지가 버리고 간, 개목걸이에 묶여 하루 종일 독서하는 어린 소녀, 라는 책을 내게로 휘~익 던졌어오. 나는 매일매일 그 책을 읽었어요, 그러곤 그녀가 아저씨들이랑 딸 뻘뻘 흘리며 침대 시트를 더럽힌 후 가져오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빵과 세상에서 가장 질기고 아름다운 구두를 먹고, 신고, 먹고, 신고······ 하면서 훌쩍! 훌쩍! 자라났어요,

이제 그녀는 개목걸이 대신 내게 지폐를 주며 나를 밖으로 내몰았어요, 내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아주 커다란 침대를 들여 놓아야 했거든요, 나는 그녀가 준 돈으로 시시껄렁한 담배도 피우고 멋대가리 하나 없는 남자아이들과 술도 마셨어요, 그러나 내 눈에는 언제나 개목걸이에 묶여 하루 종일 독서하는 어린 소녀만 보였어요, 호호 입김만 불어도 금세 줄줄 녹아내리는 500원짜리 아이스 바 같은,

그래도 나를 이만큼 키운 건 그녀의 징벌 같은 사랑이고 내 몸은 아직도 빵집 아저씨와 구둣방 아저씨의 줄줄 녹아내리는 아이스 바 사랑으로 보호받고 있으니, 싫어도 어쩌겠어요, 우리는, 그 누구도 혼자서는 살지 못하는 벌받은 족속들이니, 나는 평생 보이지 않는 그녀의 개목걸이를 목에다 걸고 육체가 영혼을 벗어던지는 그 순간까지, 인생이 주는 감동을 금단한 채 아이스 바처럼, 아이스 바 사랑으로,

내 역할을, 아무리 발버둥쳐도 변경해주지 않을 내 역할을, 내가 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유산(遺産)

새우깡에 길들여진 갈매기
뻥퀴기에 환호하는 비둘기
밤마다 쓰레기통 뒤지며 눈 번득이는 고양이
개발지역 푯말 앞에서 뿔뿔이 흩어진 맹꽁이 가족
달리는 도시 고속도로 바퀴에 깔려 죽은 사슴
구멍 숭숭 뚫린 산비탈에서 배고파 죽은 멧돼지
점점 더 내려앉고 도려내지는 산과 들
점점 더 기름때 묻은 소금물로 변해가는 바다
별들을 다 삼키고도 더 높이 더 빨리 올라가는 빌딩숲

그 아래
유산당한
하얀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둥둥 떠내려가는






생태보고서 2 ··· 허연

말라버린 소금호수 위에 넘어져 생긴 상처의 쓰라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쓰라림. 꼬리뼈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며 성질 사나운 비둘기가 떨어뜨린 깃털이 눈처럼 내리는 소금사막에서 나는 살았다. 금세 불어온 바람이 발자국을 몽땅 지우니까, 사라지는 건 이데올로기. 소금이 날 무시하고 날 버리고, 풋내 나는 사랑 하나 간직하지 못하고. 내 걸음걸이를 어떤 운명이 몰려와 통째로 지워버리는 그런 날이다. 끝도 없는, 저승과 진배없는 소금밭 위를 기어간다. 목이 마르다. 작은 소금 결정에 비치는 난반사의 삶. 소금 위에 갇혀버린 백악기의 찢어진 틈새.

소금 가루 흩날리는 흐린 날이다.





빛이 나를 지나가다

초월한다는 게 도대체 모르핀 같은 건가. 손목이 부러지고 깁스한 지 한 달째, 우울한 팬터마침으론 아무도 웃기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이미 어두울 만한 데는 몽땅 어둡고 뼈만 하얗게 빛나는 밤하늘이 필름 속에 그득하다. 고래고래 욕하고 헤어진 사랑만 하얗게 남는구나. ‘2주만 더’라는 의사의 선고를 받고 피식 웃었다. 혹시 썩고 있는지도 몰라. 빌어먹을, 흙 속에 손목을 파묻고 싹이 나기를 기다리지.

남은 한 손에 가방까지 들었는데 하필 비가 올 건 또 뭔가. 택시의 얼굴이 하나같이 사납다. 글씨야 안 쓰면 그만인데, 손 다치고 나니까 웬놈의 박수 칠 일이 이렇게나 많은지. 용서하자. 빛은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나를 지나쳤을 뿐, 어차피 내 손목이나 내 사랑은 안중에도 없었다.





수천만 년 전

마지막 지층 속에나 남겨져 있을. 짓이겨지고 짓이겨져서 이젠 탄소 알갱이보다 작은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알갱이 속의 눈물과 알갱이 속의 저주와 알갱이 속의 그리움을. 알갱이 속의 신(神)과 알갱이 속의 망연자시을 알갱이 속의 눈꺼풀을.

출근을 하면서 그날을 생각합니다. 낙타가 고래였고, 고래가 낙타였다는 시절을 생각합니다. 그들 중 누군가가 바다로 걸어 들어갔던 그날을. 그들이 왜 헤어졌고 다시 만나지 못했는지. 수천만 년 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당신께 묻습니다. 왜 바다로 간 건지. 왜 지층은 아직 침묵인지. 화석도 남기지 않은 날들을 도대체 누가 믿어줄 건지. 알갱이 속에 갇힌 수천만 년을 왜 말해주지 않는지.

오늘도 지층을 파면서 묻습니다
당신은 낙타였던가요, 고래였던가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 김소연

내려앉는다
우주의 저음이 지금 네 손바닥 위에
거대하게

너는 나락으로
편안히 가라앉는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오후
키 큰 꽃들이 창자를 내어 말린다
창자는 뼈처럼 단단해진다

어딘가에서 너의 울음이 들린다
울음의 박자를 나는 더듬는다
한 박자 하나, 반 박자 두 개

미지근한 커튼을 친다
바람만 들어오시고 빛은 나가 있으라
제발 나가 있으라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키 큰 꽃들의 뼈를 집는다
너의 길목에 배열한다

이토록 울음이 오래된다면
가장 늦은 일이 될 것이다
네가 너를 찾아내는 건





자책을 사모하여

자책을 사모하여 밤을 새웠죠 우린 눈동자를 버렸어요 밤의 심복이 되려고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한 흑마술이에요 사나운 눈썹을 퍼덕이며 당신은 칼을 내밀었어요 매번 찌르지는 않았죠

반포지구 고수부지에는 모기 떼가 운기조식하고 불빛들은 푸른 눈을 치켜떴어요 모든 게 다행히도 찬연했어요 구하고자 하는 게 눈앞에 펼쳐졌어도 자책을 사모하여 우리는 강물만 바라보았어요 모기가 한철 양식을 다 모을 때까지

당신이 함께했고요 달빛은 등 위에서 빛났죠 소용없었어요 당신의 입김이 왼쪽에서 불어왔으나 모든 것은 여름밤의 바람처럼 머리칼을 살짝 흐트러놓고 지나갈 뿐이었죠 주문처럼 들리던 당신 목소리는 있었지마는 자책을 사모하였기에 기울일 귀가 없었다죠 우린 퉁명한 서로의 입술만을 하염없이 바라봤어요

함께 앉은 우리 벤치가 자책의 힘으로 길게 늘어난 건 그때였을 거예요 우린 아득히 멀어졌구요 한 사람은 통일대교로 성큼성큼 한 사람은 올림픽대교 쪽으로 휘청휘청 마주 보며 까르르 웃었어요 워낙에 자책을 사모하므로 이렇게 번번이 멀어져 언젠간 각자의 조국으로 귀향하게 될 거야 기다란 시소를 탄 아이들처럼 환희작약 놀았던 거예요

절망은 너무나 안전하므로 차마 디딜 수 없었구요 우린 다른 용기를 내야 했어요 자유로에서 고함을 지르며 달렸어요 과속 감시 카메라가 환대하듯이 플래시를 터뜨렸어요 그 길에는 쉽게 갈 수 있는 끝장이 있었구요 다 왔구나 쉽게 돌아설 수 있었던 거예요 곤히 잠들어 있을 당신에게 메시지도 보냈어요 즐겨 내미시던 그 칼로 한번쯤은 우리 심장을 깊이 관통해주십사 하고

자책을 사모하여 우린 금세 후회하고 말았지만요 후회를 자행하는 이 새벽의 만용을 우린 한 뼘 더 사모하므로, 이 무슨 개소리일까 할 당신보다는요 새벽의 이 절실함을 우린 한 뼘 더 사모하므로 비밀번호를 입력하고는 우리만 아는 요새의 문을 열었어요

만족한 얼굴로 우린 누워 있어요 엎드린 채 베개 밑에 두 손을 넣어두었죠 나란히 엎드려 이렇게 손을 가두는 것은요 부디 아무도 껴안지 말라는 우리만의 지령인 거예요





사의 찬미
-그러나 가끔 영화에서는 보인다.
본질이 본질에게 하듯이
존재가 존재에게 하듯이
내가 나에게 복수하는 것이
죽음도 길이라는 것이
가끔 보인다.*

계절은 언제나 몰매처럼 덮쳤다 겨울이 가고 봄날이 오면 눈을 감고 그 매를 다 맞듯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지옥을 외투처럼 두르듯이 밤이면 다 똑같은 밤 하늘도 물끄러미 언제나 하늘 추위보다 더 시렸다

손에 안 잡히는 못된 애인과 당신은 똑같애 먼저 오라고 손짓하고 먼저 나를 반경 바깥에 배치하는 고단수 그리하여 나에게 전의를 불태우게 하는 유일한 적수 나는 도착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표독하게 아무것도 그리하여 나를 당신이 기다리게 하리라 당신 스스로를 번제하며 속수무책 재가 되게 하리라

그렇다고 당신을 마나보지 못했던 건 아니다 어쩌면 그토록 작은 심장을 가질 수 있었을까 당신은 육교 위에 네모난 상자 속 병아리 같았다 그렇게나 가는 핏줄을 통해 목숨을 어쩌면 그렇게 어쩌면 도대체 내 손바닥 위에서 그 작은 심장이 애처롭게 팔딱대어 나는 내 명치를 손바닥으로 누르고야 말았다 그러곤 납작해진 당신을 내려놓았다

당신을 본 후로 나에겐 모습이라는 말보다 몰골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고 살다 보니 기다림 따위는 버려지지 않고 낡아가는 만년 달력이 될 뿐이더라고 당신 또한 마찬가지인 거라고 이 소리를 들으면 또 당신은 복수를 하느라 아름답고 말겠지 온갖 잡것들이 소생하는 봄날처럼 징그럽게 혹독하게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만날 사람 다 만나며 내가 도착해 있는 곳을 둘러보니 당신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으셨던 나와 당신을 기다리며 치는 화투 같은 나의 시와 짝짝 패가 붙어 끗발이 오르는 시를 치는 벗들과 당신이 펴놓은 명당에 둘러앉아 나누는 기쁨과 낙관에 대한 이 요란한 교류들과 달빛을 새살로 두르고 만취한 채 엎어진 술병들과 눈앞에 나타나자마자 작살이 나는 거나한 육고기들과

문 열어라 이것도 끝이라면 끝이고 집이라면 집이리니 문 열어라

* 허순위 시집 『말라가는 희망』(고려원)「극장에서」의 일부.




속삭임 ··· 배용제

저물녘, 낮과 밤이 천천히 스쳐 지나는 소리,
낮의 나무가 밤의 나무에게
반짝이던 창들이 검은 창에게
창밖의 숲이 창 안의 숲에게
몸 바꾸는 영혼과 영혼이 서로를 어루만지며 나누는 속삭임.

골목을 오가며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노인을 보네
스스로 무언가를 묻고 답을 해가며
알 수 없는 감각이 열리고 닫히네
나무에게 그림자에게, 혹은 어둠에게
속삭이는 저 다정한 목소리
그때마다 텅 빈 노인의 내부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이상한 고요를 보네

길 위의 형체들이 흐려져 까마득해지자
젖은 어둠과 구름에게 이름을 불러주네
어두워지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저 속삭임,
더듬더듬 흘러가는 노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네
밤의 고요 속에서 피어나는 속삭임들 사이로
수많은 영혼들이 오거나 가고
지상의 마지막 문들이 꿈속의 방문객들을 향해 열리고 있네

속삭임을 멈추지 않는 노인과
노인의 주위로 몰려드는
나무와 창들과 숲과 늦게 뜬 별들이 다정하게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네





꽃들

반짝이는 꽃들,

태양과 바람이 뒤엉켜

또 몇 개의 풍경에 쉴새없이 구멍을 뚫고 있다

그 날카로운 것들이 꺼내놓은

풍경의 유일한 내부를,

내부가 외부에게 전하는 유일한 애무의 방식을

이해했던가 나는,

도대체 어떤 꿈속에서

저 붉고 예리한 이파리에 베인 적이 있었던가

숨을 쉴 때마다 비릿한 젖 내음이 난다

나는 만 번째의 풍경을 버려두고 돌아선다

꽃의 중심으로 버려진 풍경이 서서히 빨려든다

태양과 바람의 경계를

완벽하게 분리하게 좋은 지점에서 흔들리는 꽃들,

밤이 되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상한 세계의 풍경들이 쏟아져 나온다

다시 나는 만한 번째 풍경을 향해 가고

서둘러 꽃의 중심을 맛본

태양과 바람이 피를 흘리며 떠나고 있다





잠재적 슬픔

불 꺼진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무중력 상태의 거울 속을 걷듯이

무엇도 기억되지 않는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나는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계단을 다 내려와
불빛이 보이는 입구에서 거울을 보았다
내 몸엔 수십 개의 눈들이 돋아나 있었다

그 눈으로 나를
한참 동안 넋 놓고 바라보며 서 있었다





얼음 탁본 ··· 손택수

얼어붙은 연못 위에 낙엽이 누워 있다
얼음에 전신을 음각하는 이파리,
파고 들어간 자리가
움푹하다
끌도 정도 없이
살갗을 파고드는 비문이 있다면
비문도 나의 살점이 아니겠는가
말을 안으로 감추어버린 백비(白碑)
속에서 말을 꺼내듯
빙판을 어루만지는 손,
마음에 탁본이라도 떠볼까
덜 아문 딱지라도 뜯듯
이파리를 걷어내자
얼음 속으로 실핏줄이 이어진다
따끔따끔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잎맥이 돋아난다





푸른 돋보기

돋보기에 빛을 채집하며 놀던 내 어린 날 같지
호랑가시나무는,
붐비는 빛들을 한군데로 끌어모아
골똘해질 줄 아는
돋보기안경을 가졌지
안면도에서 얻어온 호랑가시나무 이파리 좀 봐라
빛을 받아 반짝이는 저 푸른 돋보기들
이파리 가상이 막 찢어질 때까지
살갗 밖으로 가시 하나가 돋아날 때까지
불끈 힘이 들어간 잎맥들 좀 봐라
한군데로 집중한 채 불거져 나온 힘줄들
사방에서 모여든 잎맥들의 소실점 하나
드릴 구멍을 내듯
잎 가상이를 바짝 밀어붙이는 뿔
그 앞에서 완강하게 버티는 잎은 어떤가
뚫리지 않으려고 버티면서 잎맥을 응원하는 막은 어떤가
가시가 꽃 핀다 화라락 돋보기 소겡서
빳빳하게 버티는 제 살을 뚫고 나오는 가시
없이, 꽃은 피지 않는다





부석사 배흘림기둥

봄비에 부푸는 것 꽃망울만이 아니네
이태 만에 아기를 가진 아내와
함께 올랐던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무얼 낳겠다고 저리 배가 불렀던가
사리나무 가지 끝을 차고 날아오르던 새와
이파리를 치며 구르던 빗방울
그 떨림을 아직 다 간직하고 있다는 듯
물기를 잔뜩 빨아들여 부풀어 오른 배
저 기둥 하나를 끌어안고 나도 몇 달을 버틴 것 같은데
두근대는 기둥 속에 귀를 기울이며
단잠에 든 밤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태백산 사과꽃 진 자리
아기 심장 뛰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고
부푼 배가 무덤이었다고
봄 내내 말을 잃은 아내와 다시 오른 부석사
배흘림이여, 몸속에 칼자국 왔다 간 나무여
저녁 범종이 운다 범종 소리를 듣고 마악
돋아나는 별에 닿을 듯이
부풀어 오른 배흘림이 운다





콜라 ··· 최치언

콜라캔을 짓밟으며 너는 햇살을 등지고
가장 머저리 같은 웃음을 지었다 너의 등 뒤로 커다란 바위들이 보였고
흑인 다섯이 쓰러진 장미밭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더러운 발과 하얀 이빨을 그들은 죄의식처럼 신에게서 선물 받았다
너는 찌그러진 콜라캔을 집어들고 이빨로 물어뜯었다
양철지붕 위에서 안델센을 읽던 너의 눈은 그날처럼 맑았다
너의 두 눈 속으로 폭염 같은 눈물이 들끓었다, 서서히 출렁거렸다
너는 물어뜯은 콜라캔의 날카로운 모서리로
너의 옆에 서서 오래도록 아버지의 주검을 들여다보는 어머니의 눈을
그어버렸다. 멀리서 흑인들이 갓뎀 같은 미소를 지으며 거대한 성기를 손으로
비벼 들며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장미처럼 종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머니 당신은 나에 대한 아무런 죄도 없어요
거대한 바위들이 하나 둘 허공 위로 떠오르고
나의 강아지들이 나비를 좇아 뛰어온다 장미는 종소리를 이슬방울처럼 날리고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조그마한 항문으로 배설하고 싶어졌다





개인의 집

식탁 아래로 붉은 하이힐이 두 켤레 놓여 있고
벽지에선 꽃들이 흘러내리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집에서
아버지는 한 그루 큰 나무처럼 서서 당신의 굵고 힘찬 뿌리를 화분에
심으려고 자꾸만 컥컥대며 우는데

아버지 언젠가 기억나나요

처음엔 삼 센티만하던 나의 키는 어느새 바람을 닮아 구름 높이 올라가고
의자가 왼쪽으로 빙빙 돌며 접시들이 조심스럽게 침묵 속에서 춤을 추던

책장은 좌측으로 변기는 우측으로
거울은 바닥에서 한 뼘 정도 걸려 있네 너희들은 알 수 없는 단어들을
알아들을 수 있게 발음하고 전화기는 천장에 매달아두는 거야
그날 엄마가 목을 매달았듯이

이 아름다운 우리 집에서
나는 앞으로 걷는 것을 까먹고 뒤로 걷는데
뒤로 걸으면 자꾸 아버즌 작은 나무가 되어가고 나중은 아주 작은
씨앗처럼 보이다가
아버지는 제가 보이세요

누나들은 침대 속에서 나오지 말고 복도는 점점 좁아지게
문은 가로로 누워 있게 만들고 너는 나의 성기에서 나와 삼각형으로 서 있고
너는 삼각형에서 파란색으로 흘러나와 움직이고
이 집에서 가장 듣기 좋은 말은
아빠 밥 주세요

식탁에 이렇게 모여 앉으면
우리들의 발은 허공 속에 덜렁거리며 흔들리고 붉은 하이힐 두 켤레가
한 켤레는 아버지의 발을 향해 놓여 있고
다른 한 짝은 빈 의자를 향해 놓여 있는데 아버지의 새로운 여자는 언제쯤 올까요

아버지 기억나세요

이 아름다운 집에서 당신만 없다는 것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진다던
엄마의 말이

꽃을 틔우지 못하는 정원은 커튼 뒤로 물을 찾는 주전자는 사선으로 서 있게 하고
노래는 벽과 벽 사이 귀퉁이에서만 부르도록
이 집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아빠 밥 더 주세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식탁 아래로 붉은 하이힐이 두 켤레 놓여 있고





피 속을 달린다

피 속을 달린다 세 마리의 꽃이 대가리를 물고기처럼 꼿꼿이 세우고
전속력으로 피 속을 미끄러지는 생각을
얽히는 지느러미를 더 단단히 잡아매고 피 속을 달린다
소녀가 바다를 들고 있는 곳까지 내가
소녀에게서 모래를 낳을 때까지 꽃들은 달린다 피 속을 더 힘차게
꽃들의 대가리가 비늘처럼 한 풀 한 풀 벗겨진다
바람이 후려치는 주먹을 다 맞으면서 세 마리의 꽃이 수천 마리의 꽃들이 될 때까지
찢어지고 피어나고 꽃들의 군단이 되어
피를 숨결처럼 휘날리며 온통 허공이 핏빛이 될 때까지 질척질척한
피의 심연을 외다리로 짓밟으며 피 속을 달린다
바다는 돌처럼 무겁고 소녀는 어머니처럼 무섭다 피를 흘리는 건
내 눈이다 내 눈 속에서 흘러나오는
피 속을, 소녀에서 처녀가 터져나올 때까지
약속에서 꽃들의 이빨이 터져나올 때까지
피가 피로 어두워질 때까지





붉은 달 ··· 고은강

달이 얼굴을 뭉개며 미숙아처럼 떠오른다 저 일그러지 달 하나 먹고 고구려처럼 광활해지는 여자는 욕망의 수녀인가 금욕의 창녀인가 한껏 게을러진 피가 눈부식 격정으로 회전하고

세상이 반대하여 첫 남자와 살을 섞지 못한 나는 더럽고 비루하다 아주 오래된 곳으로부터 내 영혼의 소란(騷亂)이었던 이 수치를 누가 좀 시원하게 부숴주렴

헛된 것 하나 걸어두고 얼굴이 지워지도록 치열하게 밤을 문댄다 자기 고독에 벌겋게 열광하다가 이쯤에서 등을 떠밀어 모퉁이 저쪽으로 너를 넘겨주겠지만 하지만 저 달, 여러해살이풀

바람이 허리께를 기관차처럼 그으며 지나가면 입속의 알싸한 능선, 터뜨리고 싶어 네 일그러진 뺨 위에 한 장의 손을 화르르 얹고서





곰보유리

오톨도톨 영혼의 피부가 만져져

계집아이를 낳으면 생리 없는 여자로 키워 세상의 우두머리로 세우고 싶었어요 하지만 나는 불임의 태초, 고독의 구설에 입덧은 해도 쉽게 통속을 지분대지 않아요 언제나 나를 무겁게 하는 삶의 방식들, 가로질러 왔으나 아무런 내용도 가질 수 없었고 열대우림이에요 무성한 어깨 위로 잔설처럼 시름이 돋아 혼자서 훌쩍이는 어스름이에요

나는 왜 지평(地平)이 되지 못하는 소문뿐인가 갑피동물처럼 단단한 선잠을 깨뜨리면 부끄러워요 세속의 마음, 삶이란 단지 첫인상의 의미를 환유하는 운동 같아 울울창창 말발굽을 몰아서 환유의 겹을 달려갑니다





월광 소나타
-Adagio sostenuto

내 마음인데 내가 가질 수 없는 마음 위다 끊임없이 무늬를 놓아주는 게 물의 업이듯 나도 발무늬를 지우며 그 위를 걸어본다 천천히, 고통이 헐린 뒷면을 매혹적으로 풀어헤치며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열세 번째 은유를 끌어안고 자결한 묵음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 하얗게 입을 벌리고 모든 불투명들은 제 그림자를 닦으며 저문다 불빛 하나 꺼뜨려 더 큰 어둠으로 환해지는 꿈속의 잠을 열고 파문도 없이 내가 스며든 것일까 아름답게 눈을 뜬 무명의 시신들이 나른하게 헤엄쳐 와 어느새 나를 노닐고 저승 냄새 살가워진다 마음 없음이 마음이라 덜그럭거리지도 않고 마냥 아름다운 이여, 부디 내게 비명 없는 키스를 오 열렬히





즉흥적인 대답 ··· 오지녀

누군가 방을 통째로 옮긴 것이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은 바람이 자주 충돌하는 구름나무 숲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리는 바닥에서 곡선만큼 유연한 하늘의 움직임을 느끼며

나를 혀로 둘둘 말아 달아나는 동물의 입속처럼 끈적하고 따뜻한 어둠이다, 라고 생각할 때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초침 소리
그것은 내 옷에 새겨진 기하학적 무늬들처럼 영원한 발자국을 찍고

거스러미 많은 나무 뒤에서 아니면 구겨진 일기장 속에서
훔쳐보고 있는 것이다 얼굴 없는 자들이
내가 처음부터 잃어버린 단어나 문장의 감정을 품고 구부정하게 서서 굵고 낮게 떠들다 내 얼굴 위로 쏟아진다

이것은 일종의 신호다
나는 손가락으로 빽빽한 숲을 더듬거렸다
코끝에서 굳어가는 냄새의 근원을 찾아 헤맸다
헤엄ㅊ고 싶었다 커다란 지느러미를 흔들며
구름 알갱이가 비가 되지 못하고 떨어지는 바닷가에서

사람들은 음악과 술에 취했다
나도 그들처럼 자주 취했다
지금 나의 눈빛이 가리키는 곳
헤픈 바람의 행로나 혈관만 남은 나무 그림자
이것은 얇은 의식 너머의 저쪽, 실루엣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잠겨 있다
녹슨 수도꼭지가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물을 꽉 물고 놓아주지 않는 이곳에서
나는 성문(聲門)을 닫고
다만 오래 잠들었던 것이다





썸머타임(summer time)

그때 우리는 남반구와 북반구의 계절이 교차하는 곳에서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리 위를 달리고 있었다
다리 아래 흰 구름이 회전판처럼 돌아가면
너무 일찍 죽은 가수의 노래가 입속에서 맴돌다 흘러나오고

우리는 사선으로 날아가는 새떼인지 몰라
날개를 접었다 펴면서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호흡
그 호흡에 익숙햊기 우해선 공중에서 죽어가는 일에 대해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되었지만

길은 난간 없는 나선형 계단처럼 구불거렸다 지나치거나 가혹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어떤 경계를 지나고 있었다
이를테면 1시 59분에서 1분이 지난 후에 3시를 경험하는 썸머타임처럼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이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빠르게 옮겨갔다

여름이었다 겨울이었다 여름과 겨울 상에 놓인 오후였다
뜨거운 바람 속으로 달리고 있었고 우리는
거식증에 시달린 여자의 목소리를 사랑했다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헉를 달래주어도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언제까지나 길고 높았다
가느다란 교각 우에서 떨어짖 않을 만큼 어지러운 장면을 함께 숨쉬며 가끔씩 뒤를 돌아보았을 때
한 토막씩 잘려나가는 샛노란 태양

어쩌면 우린 거대한 시간을 통과한 건지 몰라
공중에서 추락하면서 질끈 눈을 감아버리는 순간처럼 수많은 기억을 봉인한 채
이곳에 너무 일찍 도착했거나 지각했는지도





기린과 나

순간, 기린의 눈과 마주친다
큰 나무으 나뭇잎을 절반쯤 뜯어 먹은 기린 앞에서 나는 벌써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비웠다
땡볕에서 눕지도 앉지도 못하는 기린을 보며
나는 기린의 목이 참 길다는 생각을 하다가 내 배가 참 부르다고 생각한다

화면에 내 얼굴이 비친다 금방 기린의 얼룩무늬에 잡혀 사라진다 사르르 배가 아프다 동시에,
까맣고 큰 눈동자로 기린이 나늘 보며 씹는다 계속

껌벅이는 눈, 기린이 긴 혀로 날름거리며 나를 핥고 있다 나는 콧등에서 발등까지 순식간에 흐물거리다 녹아내린다
이것은 적도가 내 몸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
한차례 소나기 후, 오후가 끈적해졌기 때문

날마다 목이 마른 건 기린이 아니야
기린의 참을성은 믿을 만하다
초원의 저 끝에서 마른풀을 쓰려 불어오는 바람에 입술을 대고 쪼그려 앉아 또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
이렇게 오치는 건 기린이 아니야
그늘이 점점 작아지는 큰 나무, 나뭇가지에 목을 기대고 기린은 단지 먼 곳을 바라보다 잠깐씩 졸다

오늘은 흘러내리는 기분, 바람이 불 때마다 기린의 긴 목에서 마른풀 냄새가 피어오르고 나는 아무도 없는 창밖을 보다
다시 푹신한 소파에 누워, 희미해지도록
멀뚱히 기린이 바라보고 있는
한낮의 지평선
한 통의 아이스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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