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오월 / 고창환

언어의 조각사 2014. 5. 28. 11:22

오월

 
고창환


 
바람이 지날 때마다 눈이 부시다 잎이 넓은 나무들 세상의 그늘을 가려주지 못하고 나지막이 엎드린 가난 위에서도 반짝거리는 나뭇잎 착한 이웃들의 웃음처럼 환한 잇몸을 드러내며 햇살이 쏟아진다 사람의 흔적이 자목련 향기처럼 아름답다 숲을 떠난 꽃씨들이 큰 길까지 날리고 나른한 향수에 풀린 마을을 내다본다 골목길을 따라 풍선마냥 가벼운 마음들이 들락거린다 자꾸 꺾이는 바람도 세상살이가 조금씩 눈에 보일 쯤이면 바로 펼 수 있을까 마주치는 세상의 모퉁이마다 큰 바퀴가 지나고 마른 돌가루가 날릴지라도 손바닥을 펴서 햇살을 받는다. 사는 날까진 기다릴 것이 남아 있는가 오랜 희망을 다시 짚어보듯 푸른 소리를 실어나르는 송전탑을 향해 귀를 세운다.

<1996년 동아일보>


심사평 : 정진규 , 정과리

아직까지도 신춘문예가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간직하고 있는 등단 절차의 원시성 때문일 것이다. 일체의 외적 조건이 배제된 상태에서 오직 작품만 가지고 승부를 거는 것. 그 원시성이 신춘문예를 도전해볼 만한 싸움터로 만든다. 하지만 관념과 실제 사이에는 너무 큰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선자는 이른바 '신춘문예용' 모범답안지를 거듭 넘기는 고역을 치러야만 했다. 한결같은 '하다'체의 정돈을 가장한 진술들, 진부한 이미지의 오용, 그리고 삶에 대해 짐짓 의젓한 체하는 꾸민 태도는 투고작 전반에 편재해 있는 거대한 상투형이었다.
 
이 상투성과 싸우면서 마지막까지 남은 고창환의 '오월'은 햇살과 나무의 대립을 나뭇잎에 투과된 따뜻한 햇살로 변용시키고 그것을 다시 사람들의 환한 웃음에 조응시키는 연금술적인 조형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각기 좋은 시적 개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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