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 유금옥
산골 마을도서관 회원들은
하얀 틀니를 끼고 오십니다
오늘은 한글기초를 배우는 김순덕 할머니가 지각하셨는데요 사유인즉, 세수 깨깥이 하고 농협에 돈 삼만 원 찾으러 갔는디, 그동안 배운 이름 석 자 써먹으려고 펜대를 쓱~ 잡았는디, 아, 글쎄! 손가락이 벌벌 떨리고 기가 칵 막혀서리, 그만 내 이름을 잊어뿌랳지 뭐야! 푸하하하
도서관 바닥으로 하얀 틀니가 떨어지는 중입니다
유리창 밖, 찔레꽃잎이 하얗게 흩날리는 중입니다
자신의 이름도 모르는 산새들이 가갸거겨 지저귀는 봄날입니다
새와 꽃의 지능지수/ 유금옥
낡은 함석집 스물두 채, 대관령 산골짜기
우리 마을 전체 주민은 34명입니다
16명은 알코올중독자이고
3명은 정신병자입니다
웃을 때 보면 뻐드렁니가 유채꽃보다 샛노랗습니다
햇빛 미끄러운 밭둑을 거닐다 이들을 만나면
얼싸안고 횡설수설 피어날 수밖에 없는 곳
전교생 6명, 우리 마을 초등학교
5명은 결손가정이고 그 중에
2명은 지체 장애자입니다 커다란 거울 앞에
화분이 놓여 있는 복도에서 이 아이들을 만나면
인사하고 또 인사하고 지지배배, 지저귈 수밖에 없는 곳
나무 이천이백 그루 산새 삼백사십 마리
우리 마을 새들도, 온전한 놈은 몇 안 되는지
봄 햇살 가득한 허공을 날아가다 꽃나무를 만나서
얼싸안고 지지배배 무슨 말을 나누는지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나는
부끄럽게도, 아직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대관령면 골지리 1리 2반 /유금옥
이 마을 공기에는 이빨이 있다
물어뜯기다 팽개쳐진 함석집들이
기우뚱, 나가떨어져 있다
산비탈이나 거름더미 귀퉁이
혹은, 외양간이나 개집 옆에
씨부렁거리고 앉아 있다, 무릇 거름더미란
잡초들의 싸움질이나 닭똥 쇠똥을 모아둔 것인데
목청 큰 이장 놈의 허드레소리도, 쿡
찔러 넣어둔 것인데 이곳 생활을
겨울 내내 푹푹 썩혀둔 것인데
이 쾌쾌한 풍경을 흩뿌리는 봄이면
밭이랑마다 시퍼런 산이, 쑥 올라오고
붉은 장화가 저벅저벅 피는 것이다 소와 개와 닭과
맑은 공기가 주민인 이곳에서, 나는
철통처럼 둘러싸인 산을 끼고
졸졸졸졸 맹물처럼 늙어간다
〔현대시 월평 / 존재의 처소〕부분
윤의섭
다음의 시는 현실 세계를 초월적인 세계로 전이시켜 놓고 거기에 안주하고 있는 화자의 유유자적한 삶을 그리고 있다.
대관령 산기슭, 울타리 없는 집 마당에 새하얀 빨래를 널어놓고 삽니다 뻐꾸기와 종달새가 우리 집을 물고 날아다니는 앞산에 구름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오늘 같은 날엔 산도 종잇장처럼 얇아져서 날아다닙니다
날아다니는 종이에, 종달새가 재빨리 적습니다 산더미 같은 인생은 이곳으로 가져오세요 어떤 찌든 때도 하얗게 세탁해 드립니다 -구름 세탁소-
산 아래 뉴스를 물어 나르는 TV도, 지지직거리는 지상의 방송국보다 은하수방송국이 더 가까운 곳 이 마을은 새와 꽃이 사람들보다 똑똑합니다 종달새 지저귀면 보리 베고 뻐꾸기 울면 깨 심으며 삽니다 나는, 구름 세탁소 종업원
뻐꾸기와 종달새와 빨래를 하며 삽니다 빨래가 마르는 동안 나는 헛간처럼 앉아 하모니카를 붑니다 사랑도 그대도 새하얗게 지워진 구름은 저 혼자 돌아다니며 잘 마릅니다
- 유금옥, 「구름 세탁소」(『현대시』,10월호) 전문
이 시에는 초월적인 공간과 화자가 일체를 이루고 있는 존재의 처소가 나타나 있다.“대관령 산기슭”이라는 현실 세계와 거기서 펼쳐지는 판타지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이다. “구름 세탁소 종업원”을 자처하는 화자는 “사랑도 그대도 새하얗게 지워진” “집 마당에 새하얀 빨래를 널어놓고” 살고 있다. 그런데 빨래는 사람들보다 똑똑한 뻐꾸기와 종달새가 한다. 빨래는 구름의 또 다른 형태이다. 그리고 구름은 “산더미 같은 인생”이기도 하다. “빨래가 마르는 동안” “하모니카”를 부는 화자 역시 “헛간”처럼 텅 비어 있거나 한적한 여유를 부리고 있다. 말하자면 이상적인 공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즉, 같은 지면에 발표된 다른 시(「새와 꽃의 지능지수」)에서도 암시되고 있지만 새들이 사람보다 똑똑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구름은 저 혼자 돌아다니며 잘 마른다’는 것이다. 이 공간에서는 자연이 사람의 일을 대신하고 있다. “찌든 때”도 자연에 그저 내맡기기만 하면 세탁되는 것이다. 그리고 “종업원”으로서 화자는 “하모니카”만 불면된다. 도시 문명의 상대어로서 인식되어온 자연에 대해 많은 시가 경도되고 있는 현상을 두고 서정시가 취하는 미적 취향의 안일한 도피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자연을 끌어들이고 있는 시를 굳이 제외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연은 그것과 상대적인 것들과의 차이를 형성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며. 절대적인 가치를 함유하고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위 시는 ‘사람’ 역시 본디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살고 있다.
처음과 끝이, 안과 밖이, 본류와 지류가 구분되지 않는 곳을 시인은 알고 있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정신적 처소라기보다는 그러한 처소의 정신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윤의섭 / 시인. 1968년 경기도 시흥 출생. 1994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으로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마계』등이 있다. 2009년 애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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