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문학의 향기(공부방)

[스크랩] 2014 신춘문예2

언어의 조각사 2014. 2. 14. 13:12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체면 - 오서윤(본명:오정순)

 

막, 죽음을 넘어선 지점을 감추려

서둘러 흰 천으로 덮어놓고 있던 익사자

최초의 조문이 빙 둘러서 있다

발을 덮지 않는 것은 죽은 자의 상징일까

얼굴은 다 덮고 발을 내놓고 있다

다 끌어올려도 꼭 모자라는 내력이 있다

태어날 때 가장 늦게 나온 발

저 맨발은 결국 물을 밟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복사기처럼 훑던 흰 천

끝내 남은 미련을 뚝 끊듯 발목에 걸쳐져 있는 체면

가시밭길을 걷고 있거나

아니면 용케 빠져나와 눈밭을 지났거나

물길을 걷다가 수습되어 왔을 것이다

발은 죽어서도 끊임없이 걷고 있어 덮지 않는 것일까

만약에 발까지 덮어놓았다면

자루이거나 작은 목선 한 척이었을 것이다

경계는 저 물 속이 아닌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둔 곳인지 모른다

발이 나와 있으므로 익사자다

고통도 화장도 다 지워진 얼굴은

체면이 없다

누군가 흰 천을 끌어당겨 체면을 덮어준 것이다

 

당선소감 - 시는 벅찬 동행이자 선물

 

친구와 며칠 전에 본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결코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세계관이 던진 메시지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상이 마법이 되는 순간을 부러워하고 있을 즈음, 마법처럼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당선 통보였습니다. 삶의 단면에 몇 번은 마법과도 같은 기적이 끼어드는가 봅니다.

제게 아주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있습니다. 이십대에 칠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썼던 일곱 권의 일기장입니다. 누군가 그랬지요. 뭔가 해낼 거라고. 그러나 특별하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문학이라는 마법에 걸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3학년 때 당선된 대학 문학상은 영원히 마법에서 헤어나지 못할 거라는 더 강한 주문이었습니다. 오히려 나태해져가는 일상을 깨운 것은 바닥에 납죽 엎드려 무릎을 꿇은 채로 시를 썼던 백일장이었습니다. 시를 향한 저의 최초의 경배이자 초심이기도 하지요.

시는 벅찬 동행이었고 선물이었습니다. 또 나를 기다리는 시, 통증의 두께와 깊이밖에 내세울 게 없지만 더 세게 끌어안겠습니다.

작년에 경남신문 최종심에 올랐습니다. 올해, 제게 주신 당선의 영광이 누군가에게 용기와 도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과 남편과 두 아들, 두목회 동인, 이재무 선생님과 손광성 선생님, 선희 언니와 김주, 신공나라 문우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작품을 선해주신 심사위원님과 경남신문에 허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겸허와 초심을 잊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 드립니다.

 

△1958년 대구 출생 △국민대학교 졸업 △2011년 천강문학상 시 부문 대상

△2013년 평화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심사평 - 인식의 힘 보여준 세심한 관찰

 

응모작들은 대부분 일상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생활에 밀착하면서도 소통과 공감에 주력하는 시들이 많았다. 일상의 소소한 문제들을 내면화하여 구체적인 실감을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겠으나 타인의 삶과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점은 아쉬웠다는 것이 심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다양한 분야와 계층의 사람들이 투고하는 것이 신춘문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 응모작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성도와 신인으로서의 새로움, 진지하면서도 노력의 흔적이 엿보이는 작품을 선택하자는 합의를 거쳐 이서빈, 문민철, 오서윤 씨의 작품을 최종심에 올렸다.

이서빈 씨의 뒤집기는 유비적인 상상력을 사용하여 아이의 첫 뒤집기와 노모의 화투패 뒤집기를 겹쳐 놓음으로써 탄생과 소멸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비적 상상력이 주는 단순함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문민철 씨 작품의 경우 거침 없는 화법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시간과 기억의 문제를 자신만의 문체로 이끌어가는 힘도 좋았다. 신인다운 패기가 큰 장점이었지만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 흠이었다.

심사자들은 어떤 이견도 없이 오서윤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택하였다. 오서윤 씨는 세심한 관찰력을 통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인식의 힘을 보여주었다.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고 시의 호흡을 잘 조절하고 있다는 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당선작 ‘체면’은 익사자를 덮은 흰 천에서 삐져나온 발을 통해 삶과 죽음, 인간의 문제를 존재론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태어날 때 가장 늦게 나온 발’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가고 있으며, 발의 드러냄과 감춤이 인간의 근본적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통해 몸과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시이다. 고통스럽지만 기쁜,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시의 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드리며 한국 시단을 빛낼 소중한 시인이 되시길 바란다. <심사위원 최영철 배한봉 장만호>

 

 

2014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의 악몽은 서정적이다

 

이원복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 금붕어를 닮은

항아리를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잠을 잔다

성대를 다친 소녀들, 더 이상 노래하지 못하는 금붕어들

잠을 잔다

항아리의 주둥이를 배회하는 16분 음표의 음색은

표현할수록 거친 것이어서 누구라도 성대를 다치게 된다

냉정해지자, 탁할수록 냉정해지는 게 필요하다

모두들 잠을 자는 시간, 바람의 음역대는 위험하다

저녁에 지배하는 고요의 폭력성이 고음역대 바람의 성대를 찢고

항아리의 주둥이 부위부터 깨고 있다

물 위를 부유하는 기름의 무지갯빛 닮은 금붕어의 지느러미가

스멀스멀 헤엄치는 항아리 속

성대를 다친 소녀들 입을 벌린 항아리처럼 앉아있다

시간이 필요하다

누구나 시간의 어깨에 기대어 울고 싶어 한다

소녀들이 잃어버린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시간의 암보(暗譜)다

소녀들의 등에 지느러미가 생길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항아리 속에서 소녀들이 다친 성대를 회복하고 다시 항아리 밖

거친 바람의 음표를 따를 수 있을 때 까지

누군가 깨져 허물어지는 항아리를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거기

거대한 항아리 모습의 외로움 하나 앉아 있다

 

당선소감

 

재미삼아 했던 단어놀이, 문 하나를 얻다

문득, 이 ‘문득’이라는 단어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나는 이른 아침 하릴없이 이 ‘문득’이라는 단어를 둘로 쪼개 재미삼아 문(門)과 득(得)이라 뜻을 부여하며 나만의 단어놀이로 얼어붙은 머리를 예열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겨울 아침 아직 시린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곧 손바닥이 따뜻해졌다. 들고 있던 휴대전화기의 배터리가 따뜻해졌기 때문이겠지만, 괜찮다.

나는 당선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심장에서 뻗어 나온 뜨거운 피가 온몸을 돌아 이 손바닥까지 당도하여 내 손바닥이 금방 따뜻해졌다고 믿으면 그만이니까! 그게 삶이니까! 귓속에서 심장소리가 들렸다.

그날 아침 재미삼아 했던 단어놀이. 정말 문(門) 하나를 얻었다.(得) 막상 덩그러니 문 앞에 서있으니 낯설고 긴장된다. 그러나 낯설고 긴장된 이 마음으로 다시 시를 쓰기로 다짐해본다.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문득 이렇게 하나의 거대한 문 앞으로 이끌어주신 심사위원 정진규 선생님, 그리고 경상일보사에 감사를 전한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사랑하는 아내 혜원씨, 그리고 소중한 딸 로운이, 아들 루신이, 기도해주시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나누겠다.

 

1974년 울산출생

2008년 울산산업문화축제 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2014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심사평

 

시적 공간속 질서화하는 이미지의 끈 탄력있게 조정

30명의 예심 통과 작품 114편을 즐겁게 읽었다. 상당한 수준에 오른 작품들로 수련의 흔적이 역연했다.

신춘작품을 읽다 보면 대체로 두 개의 폐해에 직면하기 마련인데 이번 경상일보의 작품들을 읽으면서는 그러한 점들이 깨끗하게 극복되고 있는 징후들을 만날 수 있어 매우 다행스러웠다. 그 두 개의 흐름이란 신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교실 지도의 냄새가 나는 작위적 유형의 흐름과 요즈음 젊은 시인들의 편향된 흐름인 관능적 환상의 자폐적인 몸짓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점들이 극복되어가고 있는 자율적인 모색의 투명한 시편들이 상당수 눈에 뜨이고 있음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의식과 표현의 균형과 질서에 대한 점이다. 사유적인 면과 지적 성찰이 너무 앞서 작위와 경직에 머무르거나 헤픈 정서의 노출로 불필요한 반복과 난삽을 일삼고 있음이 그것이다.

이런 면에서 ‘나의 악몽은 서정적이다’가 표제가 좀 작위적인 인상이 있었으나, 앞의 작품들보다 투명하고 탄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금붕어와 항아리와 성대를 다친 소녀들을 하나의 시적 공간 속에 질서화하는 이미지의 ‘끈’을 탄력 있게 조정하고 있었다. 소녀들의 성대를 다치게 한 시간의 상처에 대한 사유와 인식, 그 치유를 향해가는 건강한 포즈도 잃지 않고 있어 믿을 만했다. ‘저녁을 지배하는 고요의 폭력성’ ‘거대한 항아리 모습의 외로움 하나 앉아 있다’들의 표현에서는 시인이 지녀야 될 비의적(秘儀的) 시력(視力)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선작으로 선정함에 모자람이 없었다. 축하한다.

정진규

 

 

2014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앵무새의 난독증

 

조유희

 

의자 위에 두 개의 오렌지가 놓여있어요 나는 저 오렌지를 노란 앵무새라 불러요 한 마리는 어제로부터 날아왔고, 또 한 마리는 내일로부터 날아왔어요 어제의 혀가 내일의 혀를 그리워할 때, 당신은 내게 상큼한 거짓말로 다가왔어요

나는 당신을 앵무새라 불렀지요 당신과 나 사이의 간격은 너무 아슬해서 도저히 잡을 수 없어요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한 앵무새는 사·랑·해·사·랑·해를 원했어요 그럴 때마다 하나씩 뽑아낸 깃털 때문인지 앵무새는 몇 초마다 각을 세워요 나는 우울한 오렌지를 갖고 싶었지요

구차한 변명 따윈 상관하지 않을래요 잊지 말자는 그 매혹적인 말, 그 말을 따라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제의 의자에 내가 머물지 못한 것은 오늘의 당신이 혼자이기 때문이지요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서 오렌지는 앵무새가 되고, 오늘의 의자가 어제의 오렌지를 기억하듯 나도 내일의 앵무새를 기억할래요 오렌지가 오렌지를 사랑하는 오늘밤에 과연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시부문 당선소감

 

혼자 아닌 세상 가르침 새길것"

아코디언같은 계단을 오를 때마다 행진곡처럼 돌진하였고, 연가처럼 슬퍼서 주저앉았고, 그러다가 심장 박동같은 운명임을 실감하는 순간 그렇게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아무 것도 아닌 나를 발견한다.

오후 다섯 시, 휴대전화가 울린다. 나는 얼떨결에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듣는다. 담당 기자분이 "기쁘지 않느냐"며 되묻는다. "나는 잠결에 받아서요"라고 대답한다.

시는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이자 절대자다. 원고지같은 당선에 잠시 주춤한다. 혼자 걸어가는 길이기에 나는 두렵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세상과 함께 내게 들려주던 선생님들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정에 동참한다.

나를 아껴준 문우와 원우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무엇보다 좌절할 때마다 나를 격려해 준 가족과 형제들에게 감사한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올린다.

 

1967년 목포 출생.

2013 목포문학상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 재학중

 

심사평

 

"연애시 빌려 불통의 시대 횡단"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1인의 총 39편이다. 모처럼 따듯한 성탄 전날, 수원본사에서 회동한 심사위원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당선작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엘뤼시온'과 '앵무새의 난독증'이 단연 돋보인다는 점에 쉽게 합의했다. 우선 두 후보자 모두 응모작들의 전체적 수준이 비교적 고르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작품들 사이의 비대칭성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면 미래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의 시는 아류로부터 자유롭다.

만만치 않은 시력(詩歷)이 감지됨에도 불구하고 읽고 나면 어떤 기시감(旣視感)에 약간의 실망을 금치 못하던 작품들에 대한 안타까움 탓에 두 작품이 보여준 자신만의 활달한 어법은 종요롭다.

'엘뤼시온'은 무엇보다 관념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유능력이 주목된다. "타인의 웅변에 깃들어 살아왔다"로 시작되는 그 서두도 범상치 않지만 남의 시선에 지핀 즉자(卽自)가 그 장막을 찢고 스스로 대자(對自)로 진화하는 정신의 율동을 싱싱하게 보여주는 바가 아름답기조차 한 터다. 그런데 시 후반부로 갈수록 주의적(主意的)인 경구(警句)들이 돌출하여 관념성을 노출하는 게 흠이다. 교훈시 비슷한 경향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과제다.

'앵무새의 난독증'은 '당신'의 유혹에 응답하는 일종의 연애시다. 그렇다고 그냥 익숙한 낭만적 서정시냐 하면 아니다. 지적 조작이 만만치 않다. 리듬과 리듬, 이미지와 이미지, 그리고 논리와 논리 사이의 연락이 마치 재봉 자국이 보이지 않을 만큼 조밀한 터다. 그렇다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 시를 지배하는 어조는 기본적으로 해학이다. "어제의 혀가 내일의 혀를 그리워할 때, 당신은 내게 상큼한 거짓말로 다가왔어요"라든가, "잊지 말자는 그 매혹적인 말, 그 말을 따라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처럼 말과 말 사이가 성글다. 그 틈 사이로 사랑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실험하는 물음이 솟아오른다. "오렌지가 오렌지를 사랑하는 오늘밤에 과연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연애시를 빌려 이 불통의 시대를 횡단하는 용기를 불사하는 시인의 뜻이 이만큼 절실하다.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삼는 데 최종 합의하였다. 축하한다. 정진을 바란다.

고은, 최원식

 

 

2014 경제신춘문예 시 당선작

 

집배원 / 권삼현

 

그동안 뭐 했냐고 묻지 마라

우체국으로 걸어간 봄은 온통 꽃 필 생각이다

울퉁불퉁 생긴 대로 볼품없는 세월

집배실 옆 차르르르 햇살 엎질러진 모과나무는 안다

향기란 어쩌면 제 몸을 뚫고 나오는 연둣빛 새순 같은 것

오늘도 백오십리길

꽃 소식 앞장세우고 배달 나가는 집배원

빨간 오토바이 휘청이도록 봄바람 분다

풀빛 연애편지는 내가 업어주고 싶은 것들

바람 불고 황사 자욱한 땅에 모과나무는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꽃 필 생각이다

봄을 찾아 가다가 막막했던 모든 것들이 꽃길이다

번지가 지워진 봄날의 주소를 한 땀 한 땀 기워가며

환한 우표로 들여다보았을 그처럼

제 몸에 감춘 것들은 기다리다가 꽃이 된다

아침 오는 길목 푸른 물길 지피는 봄바람 속에

우리 살아가는 동안 봄날이다

꽃 피는 나무다

 

 

2014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몬드리안의 담요 / 배세복

 

성큼성큼 들어와 붉은 사각형을 담요에 던지며 그가 말했다 너희들에게 어울리는

빛이야 그때부터 그는 우리집 벽에 살았다 어느 해 나는 내 서재를 한 번도 열어

주지 않으면서도 간신히 아내의 장롱 속에 들어간 적 있다 캄캄 했다 오래 전 걸어

두었던 희망 같은 단어에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다

그날 그는 검푸른 색깔을 마구칠했다 살짝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무렵 나는

회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사한 색깔의 연속은 불안을 가져온다 마치 잘못

맞춰진 목욕탕 타일의 무늬처럼, 그리하여 바람 푸르던 날 우리는 감탄사들을 날

려 보냈다 공중에서 흩어지는, 알고 보니 겨우 몇 개 밖에 안 되던 노란 한숨 같은

것, 올해에는 어떤 색을 보여줄까

형형색색의 아주 큰 보석을 보여줄게! 그는 한 해에 하나씩 그린 아홉 개의 사각

형에 테두리를 치고 있었다 집을 지은 후 귀퉁이를 여러 날 마름질하듯 천천히, 잠

이 덜 깬 우리들을 격자무늬로 엮어주며 서서히 벽 속으로 사라져갔다

 

당선소감

 

"문학과 더 치열한 싸움 이어나갈 것”

당신과 인연을 맺고 두 번이나 십 주년이 지났습니다. 싸움도 못하면서 매일 당신과 싸웠습니다. 어느해인가 처음으로 싸움을 시작하고 그해 마지막 날, 그간의 내력에 붉게 사각형을 그려 보았습니다. 그다음 해에도 싸움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푸른 사각형……, 그 다음해엔 다시 노란사각형……. 이렇게 근이십여 년을 싸웠지만 승자는 없었습니다.

지친 채 백기를 들려던 오늘, 누군가 싸움의 경과를 알려옵니다. 당신과 저의 싸움에서 하루만 쉬어가도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싸움이 끝난 게 아니겠지요. 이긴 건 더더욱 아니겠지요. 허나 오늘만큼은 사각형 무늬 가득한 담요를 덮고 달콤한 잠을 푹 자야겠습니다. 하지만 곧 깨어나겠습니다. 다시저는 당신의 코피를 터뜨리거나 혹은 당신에게 광대뼈가 함몰되도록 얻어맞아 한 장 또 한 장, 여러 장의 담요를 차곡차곡 포개놓아야 할 테니까요, 사각형을 한 칸 두 칸 다시 채워야할 테니까요.

시의 길을 처음 열어주시고 묵묵히 지켜봐주신 구재기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늘한결 같이 못난 선배를 걱정해주던 길상호 시인, 청림문학동인회 선후배님들과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부모님과, 오랫동안 유일한 독자였던 아내의 손도 꼬옥 잡아보겠습니다.부족한 저를 세상에 발가벗겨 주신 광주일보와 안도현 심사위원님께 깊이 고개 숙입니다. 세간을 집어던지면서라도, 문학과 더욱 치열하게 싸울 것을 약속드립니다.

 

1974년 충남 홍성 출생

한남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충남여고 교사

 

심사평

 

"차분히 읊조리는 시어 … 서사·서정적 감각 균형”

시들이 독자에게 애써 말을 건네지 않는다. 어떤 절실한 심장을 향해 하소연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않고 독자를 설득하려는 마음도 없다. 그저 중얼거린다. 일정한 수준에 올라와 있는 시들일수록 소재가 제한적이다. 일상의 소소한 안쪽을 들춰 보여줄 뿐이다.

분명히 다른 사람이 쓴 시인데 시어가 중복되는 경우가 수없이 많이 발견된다. 이미지를 비틀지도 않고 파격도 엿보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시단의 흐름이라면 새로운 시인은 주도적인 흐름을 혁파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당선작으로 고른 배세복 씨의 ‘몬드리안의 담요’도 위와 같은 혐의에서 크게 자유롭지는 않다. 하지만 서사적인 것과 서정적인 것을 균형 잡힌 감각으로 배합하는 능력은 다른 응모자들의 시와 뚜렷이 구별된다.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언어의 내부로 숨기면서 결국은 할 말을 다 하는 시다. 화자의 목소리가 들뜨지않고 차분한 것은 그만큼 내공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함께응모한 시들도 단아한 서정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신뢰를 두텁게 했다.

고현도 씨의 ‘까치의 독후감’은 그리 새롭지 않은 소재를 자신으로 눈으로 해석하는 남다른 기량이 엿보인다. 시적 대상을 꼼꼼하게 묘사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어 호감이 간다. 그러나 시를 전개하는 데 몰두하다 보니 시인의 사유가 배어들틈을 만들지 못한 게 걸렸다

이정희 씨의 ‘신바람 수선집’은 유쾌한 동시적 작풍이 눈길을 끌었다. 수선집에 있을 법한 사물들이 마치 식구들처럼 명랑하게 움직이고 있어 흥미로웠다. 다만 시를 마무리하는 후반부가 지나치게 작위적이어서 아쉽다.최종심에 오른 작품 중에서 김옥진, 최영은, 문화영, 조희진, 이세빈 씨의 시들을 마지막까지 눈여겨 읽었다. 모두들 건투를 빈다.

안도현

 

 

2014년 대구매일 신춘문예 당선작

 

옹이 / 박주용

 

난다 냄새 난다 나는 내가 긁어 부스럼이라 냄새 난다 나는 나를 날린 셈인데 냄새 나는 나는 나는 새에게도 냄새 난다 냄새는 냄새를 전이시켜 새똥 싼 내 하늘도 냄새 난다 냄새는 자꾸 가려워 구름을 비벼대는 것이어서 충혈 된 내 먹구름도 냄새 난다 소나기 한 줄금 쏟아내면 냄새가 사라질 것이란 기대는 금물 사납게 짖어대는 내 번개가 아직도 그 속에 눈이 번쩍 도사리고 있어 크릉크릉 냄새 난다 아귀를 맞추어 장미꽃을 밀어 올리던 내 거미줄에도 말 달리며 방방 뛰던 꽃물이 남아 있기는 마찬가지 옹헤야 냄새 난다 어절씨구 냄새 난다 소리 높여 노래 부르기는 시기상조 이제는 내가 나를 더불고 슬금슬금 거문고를 타야 할 때 내가 나를 데리고 묵상에 들어야 할 시간 소리 없이 냄새 나고 냄새 없이 냄새 난다 내가 나를 산책한 냄새 한 무더기 내 안을 단단히 버티어 간다.

 

심사평

 

"작가 나이 앞지른 시적 미덕"

예심을 통과한 새로운 작품들을 읽는다는 것은 우선 즐거움에 가깝다. 우리 시단의 시적 근경인 난삽하고 편협한 가독성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일상과 사유가 시의 그물망에 들어왔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다만 투고한 분들의 연령층이 높다는 것은 곤혹스럽다. 등단 연령의 상승은 신춘문예 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적인 현상이 아닌가. 이십 대에 등단한다는 희망은 이제 사치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우리는 박주용 씨의 작품을 선택하는 하나의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당선작은 박주용 씨가 투고한 세 작품, ‘나뭇잎 신발’, ‘데칼코마니’, ‘옹이’에서 가려야만 했다. 당선작인 ‘옹이’는 옹이를 소재로 섬세한 개성을 뽐내고 있다. 작품‘옹이’는 옹이를 기의로, 냄새를 기표로 하되, 냄새라는 독특한 흔적만으로 시적 의도를 정치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옹이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면 “나무에 박힌 가지의 그루터기. 또는 그것이 난 자리” 이면서 “굳은살”이거나 또는 “귀에 박힌 말이나 가슴에 맺힌 감정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작품 ‘옹이’의 배후는“귀에 박힌 말이나 가슴에 맺힌 감정 따위”에 해당되겠다. 가슴에 맺힌 개별적 감정을 옹이/냄새가 주술적 공간과 서정적 공간을 통과하면서 자기 심화에 도달하게 되는 발화 과정이 노래말로 엮어졌다. 우리말의 리듬에 기댄 이 냄새의 상상력은 낯설지만 기시감에 가깝고, 재빠르지만 부박하지 않다. 해설도 분석도 필요없이 감각으로 다가오는 시적 속도감은 ‘옹이’의 매혹이다. 박주용 씨의 ‘옹이’를 당선작으로 미는데 심사위원 두 사람이 합의했지만 씨의 연령이 오십대라는 걸 우려했다는 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어쩌랴, 시적 미덕이 나이를 앞질렀다.

다음에 거론된 분들의 작품도 몇 번이나 읽어야만 했다. 우선 이명우의 ‘실직’과 ‘척추’, 특히 ‘실직’에는 “햇빛에 나무가 더 가늘게 깎이고 있다”라는 시선이 있고, ‘척추’에는 “골조건물에 길게 세운 철근 몇 가닥 / 바람을 빼내지 못한 인부들의 허리를 갉아먹는다”라는 쓸쓸함이 있다. 조유희의 ‘앵무새의 난독증’과 김재연의 ‘슬리퍼(Sleeper)’도 우리가 주저한 작품이었다. “슬리퍼라는 단어가 / 영원히 잠든 사람들의 발자국, / 이라고 생각해보자”라는 ‘슬리퍼(Sleeper)’의 첫 연은 이후에도 두고두고 생각나는 구절이었다. 이 분들 역시 시인이 될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고 믿어진다.

심사위원 : 문인수시인, 송재학시인

 

 

[2014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길고양이 - 정순

 

다음엔 용서 할 수 없어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가볍고 은밀한 흔적들

생선과 맞바꾼 몇 개의 발자국 속엔

아직도 비린내의 안쪽을 훔쳐봤을 집요한 눈빛이 묻어있고

문 열린 주방 한 켠 함지박에 담가놓았던

저녁의 분량만이 온데간데없이 썰렁하다

도둑맞은 함지박 속의 물들은 꺼른하다

아직도 미련을 놓지 못한 듯 우물거리고 있는

갈치의 미세한 비늘만이

느릿한 공복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는 한때

함지박 속의 사연들은 내 오랜 날들의 청빈을 닮았다

쉽사리 쏟아버리기엔 못내 아쉬운 애증의 볼모같은 것

나는 오랫동안 비린내 어린 시장기를 구해와

어스름의 도둑들을 초대해 왔다

한낮의 환한 부주의를 풀어 놓고서

공복의 저녁들을 키워 왔다

아끼면 아낄수록 말썽을 부리는 무수한 날들의 불청객,

소금 한줌 집어와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스름들에게

희고 짭짜름한 충고를 야광처럼 던져주었다

 

 

2014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최재하

 

바람의 징후 / 최재하

 

붉은 헝겊 같은 노을이 살다갔다

죽은 나무에 혈액형이 달라진 피를 돌려야 할

심장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기다림의 대상이, 그, 무엇이었던 동안

더 이상 풀빛은 자라지 않았다

대신에 동구 밖의 삼나무들이 푸른 잎을 마쳤다

가두어 놓았던 귀를 풀어 놓자마자

귀가 아니라 입이었다며 우는

야행의 고양이와도 같았던,

그것은 단순히 후회에 관한 피력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소문처럼 스쳤다가 간 걸음 속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 전에 내렸던 눈이나 비가 다시 내계(內界)로

돌아갈지 모른다

당신이 보낸 전령사들, 그, 후로

당신이 직접 와서 지나간 자리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있게 할 가능성은

방향에게 기대어 목을 꺾거나

내게로 오는, 그, 동안을 하르르 밟아주는 일이었다

당신은 증명하지 않고

증명되지 않는다

바람의 채집사를 자처해 보았을지도 모르는

전생보다 더 멀리서 걸어 왔던 세월 동안

뒷모습 쪽에만 대고, 훨씬 전에 지나간 유행가 같은, 낡은,

셔트를 겨누어 보기도 했을 거라는

가장 처음일 때 오고

가장 나중일 때 닿았던

당신의 징후에게, 더 이상 생의 손가락 하나를

걸어보는 행위를

파란이라거나 파탄이라는 이름으로 치유하지는 않겠다.

 

심사평

 

시는 그렇다면 기록할 수 없는것들에 관한 기록일까

적지 않은 투고작들을 빼놓지 않고 들추어내던 와중에, 한 때 왕성한 시력을 문단에 선보였던 이 지역 출신 시인의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이라는 시집의 제목이 하나 떠올랐다. 비문(非文)이었다. 그렇다면 저 문장의 속내는 해가 지지 않을 때까지의 쟁기질 정도를 이르는 말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이라는 생뚱맞은 문장은 시적인 어법의 환기 속에서 나름대로의 매력과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시는 그렇다면 ‘기록’이상의 혹은 그 너머의 기척이며 기미까지를 비끌어 매야하는 난항과 고투와의 대면이자 확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작금 시단의 기류는 그런 정도를 넘어서서, ‘읽혀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읽히기’의 방식으로까지 세를 넓혀버렸다. 그런 사이 기존의 시들은 이미 전설이 되었거나 물을 건너버린 꼴이다. 요즘 따라 부쩍 시를 읽는 일이 무거워져 버렸다.

투고시의 대부분들은 자잘한 일상의 담론들에 그쳐 있었다. 뉴스는 신산스러운데 시들은 평안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을까? 뱀이 살아요(박평숙). 늪(곽성숙), 뿌리는 닫힌 문이다 (남상진) 보고서(한영희) 꿈의 각(박순옥) 어느 일요일 오후 (홍유나) 씨 등의 시들과 함께 조유희(앵무새의 난독증)과 최재하(바람의 징후)가 마지막까지 남았다. 두 사람의 작품은 당선권에 무난했으나, 진술의 뒤에 남겨진 여운은 “바람의 징후”가 더 깊어 보였다. 다시 또 일어나 앉아 끝장이 날 때까지 “쓰는 자”만이 시인일 것이다.

심사위원 : 정윤천

 

 

 

201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뱀을 아세요? / 윤석호

 

뱀이 왜 기어 다니는지 아세요

불안 하기 때문이래요

손발 없이 귀머거리로 사는 동물은 또 없거든요

독이라도 품어야 살 수 있지 않겠어요

얼마나 불안 했으면 혀가 다 갈라졌겠어요

남의 땅에 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혹시 은인을 찔러 죽인 전갈 이야기 들어 보셨어요

본능을 장전 하면 갈기고 싶어지죠

본능은 의지보다 늘 앞서니까요

하지만 본능보다 앞에 불안이란 게 있어요

그래서 가장 위험한 것들은 불안해 하는 것들 이래요

독을 품은 것들은 기억력이 없어요

어느 한구석 오목한 데가 없기도 하지만

사실은, 뒷걸음질 칠 수 있는 담력이 없어서래요

이방異邦의 밑바닥에 몸을 대고 살다 보면

굳이 시간을 되새기고 싶지는 않을 거에요

간혹, 숨막히게 달 밝은 밤이 있잖아요

그런 날이면 통째 삼킨 먹이를 삭히며

똬리를 틀어요 철이 든거지요

저도 한번 쭉 뻗고 살고 싶겠지요

하지만 마음 놓치면 독을 품긴 힘들어져요

무딘 칼은 피차 고통이거든요

번질거리던 각질의 모서리가 굵게 갈라져

살을 후비며 파고든 어느 밤

제 살갗을 찢어 벗겨내며 뿌리치고,

쉼 없이 날름거리며 생을 지켜냈어요

이런 아침은 늘 뻐근 해요

눈꺼풀 없이 잔 눅눅한 잠을 말려야

또 하루를 살아 갈수 있거든요

하늘에서 가장 먼 쪽으로 붙어 다니지만

햇살의 따스함을 알고 있나 봐요

서쪽으로

(*노스다코타를 지나며)

절벽은 가장 짧은 활주로다

오래 전 세상은 지평선 끝이 절벽이었으므로

하늘은 땅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논리적이다

벌써 몇 시간째 풍경은 반복되고

심한 착시현상에 시달린다

이곳에서도 역시, 삶은 시간의 변종으로 태어나서

정해진 분량만큼 살아내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아인슈타인 이전에도 이미 시간은 상대적으로 흘렀지만

이순간 차창 밖을 바라보는 나는

마치 UFO 안에서 지구를 내다보는 무표정한 외계인 같다

지금 지나는 이 도시의 건축법 어디에는

직선 구간의 중간에 역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고 있을 것이다.

모퉁이를 돌아오는 경이로움이라도 있어야

삶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때로, 견딘다는 것은 맞선다는 말보다 공격적이다

단면을 보지 않고도 두께를 가늠할 수 있는

삶들이 드문드문 차창을 스쳐 지나간다

서쪽으로 달리는 나는, 고도를 낮춰가며 집요하게

정면으로 미행하던 태양의 몰락을 이제야 목적한다

세상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는 사치스러운 몰락

제 몸 하나 다비하려고 온 하늘을 다 태우더니

어느새 깨알 같은 사리가 어둠 속에 가득하다

나도 길을 벗어나 UFO를 잠시 멈추고 사람 사는

세상에 기어들어 과민해진 감각들을 접어 누인다

 

*미국 중북부 캐나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주

 

심사평

 

"현대적 인간 존재의 외로움 참신하게 표현"

올해에는 유난히 투고작이 많았다. 심사위원들의 논의를 거쳐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시 부분에서 '귀' '물을 향해 걷는 나무 곁에서' '손을 부수다' '뱀을 아세요?', 시조 부문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 '눈 오는 밤, 프란츠 카프카' 등 모두 6편이다. 시·시조 두 장르에서 당선작 1편을 뽑아야 하는 만큼 심사위원들의 고뇌가 컸지만, 작품의 수준을 제1의 원칙으로 한다는 기준이 있었기에 당선작을 결정하는 데엔 큰 무리가 없었다.

시 '귀'는 실험적이면서도 언어의 미와 사유의 깊이가 잘 살아나고 있었지만, 너무 소품이라는 점이 한계로 지적됐다. '물을 향해 걷는 나무 곁에서'는 표현도 참신하고 주제도 서정적이라 가작이지만, 표현의 묘미에 너무 치중한 감이 있다. '손을 부수다'는 존재의 본질적 슬픔을 여러 기발한 표현을 통해 잘 살려 내고 있었지만, 시의 내용이 관념으로 흐르는 점이 지적됐다. 시조 부문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는 시조의 형식미와 서정의 깊이를 확보하고 있지만, 그 내용이 너무 전통적 정서라는 점이 한계로 지적됐다. 이에 비해 '눈 오는 밤, 프란츠 카프카'는 시조의 형식미를 현대적으로 살려 내고 있을 뿐 아니라 내용도 동시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소외의 문제를 연시조로 그려 내고 있어 주목을 끌었지만, 당선작과 최종 경합에서 아쉽게도 2위로 낙착됐다. 그리하여 당선작은 '뱀을 아세요?'로 결정했다.

'뱀을 아세요?'는 뱀이라는 존재의 특성을 통해 현대적 인간존재의 외로움과 그 지향을 참신한 표현과 깊은 사유로 살려 내고 있어 높은 수준을 보여 주었다. 일로매진하여 한국문단의 큰 별이 되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 강은교·이우걸·김경복

 

 

 

2014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바람의 사슬 / 심수자

 

거미도 없는 빈 거미줄이 도처에 무성하다

초읍동 일층 단칸방에 살다가

얇은 요위에서 오년 만에 발견된

독거노인은 백골이다

산동네 좁은 골목길이 얼키고 설켜

커다란 거미 한 마리쯤은 키웠겠다

한 생을 다한 그녀는 거미 몸에 들어

자신을 갇히게 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

풀어낸 실로 여리고 성을 쌓은 것이다

방 한쪽 구석엔 냄비와 그릇 두어개

빈 가스버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녀, 한 겹 두 겹 아홉 겹 까지 껴입은 옷은

추위 멈추고 싶은 몸부림 이었겠지

무뎌진 낮과 밤의 경계에서

이끼는 바닥의 습기를 먹고 자라고 있었다

그녀가 백골이 되어 가면서

곤충들 더 이상 걸려들지 않을 때

거미는 자신을 걸어둘 장치로

바람 속에 집을 지은 것인지도 모른다

도처에 걸린 거미줄이 내 얼굴에 닿을 때

초읍동 반 마장 거리의 파도 자락은

이미 떠나고 없는 배의 후미인 듯

거미집 바람벽을 밀고 있었다

 

당선소감

 

쓸쓸한 누군가에게 한 모금의 물을 건네라는 현몽인가

엊그제 집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뼈에 금이 갔습니다. 지난 밤, 절뚝이며 시인을 꿈꾸는 문우들과 송년모임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눈을 만났습니다. 눈 오는 날이 흔하지 않은 도시에 살고 있는 나는 눈이 전봇대 아래 내다놓은 연탄재들을 꽃무덤으로 피우는 고뇌의 순간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눈이 덮은 것은 연탄재이거나 한생을 다한 여러 쓰레기들이란 것을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것입니다. 몇 걸음 더 옮기는 곳에서는 눈의 무게에 눌린 측백나무도 안타깝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나무가 아무 말 없이 눈을 받아내는 모습이란, 시를 생각하는 내게 길안내를 친절하게 해주는 밤 이었습니다.

머지않아 눈은 녹겠지요. 버리기 위해 내다 놓은 것들도 더 측은해 지겠지요. 나무의 뿌리는 갈증의 목을 축이겠지요. 다리가 부러질 땐 헛꿈을 꾸지 말라는 계시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눈이 남은 아침에 나는 당선연락을 받았습니다. 이 또한 세상의 어지러움을 손발과 정신이 시리도록 하얗게 문질러서 서럽고 쓸쓸한 누군가에게 한 모금 물을 건네라는 계시로 받아 들여야겠습니다. 늦은 나이지만, 늦었다는 생각도 지우겠습니다. 사는 일에 골몰하다 미루어둔 문학의 꿈을 이루도록 물가로 인도하느라 애써주신 대구시창작원 박윤배 선생님과 뒤를 묵묵히 지켜봐주신 가족에게 감사드립니다. 형상시 문우들 먼저 신춘 문을 열게 됨에 왠지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뽑아주신 선생님들의 건강을 늘 잊지 않고 기도하겠습니다. 애독하는 불교신문사의 번창을 기원 드립니다.

 

심사평

 

이 시대를 실감케 하다

끝자락에서 만난 시가 새해의 시로 태어나는 일에 나도 설레기를 마다하지않는다. 많은 응모작들을 예선이라는 체로 걸러서 나에게 온 것들도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었다. 숨찼다.

작자는 멀리 칠레까지도 가 있고 오세아니아의 어디에도 가 있는 화자(話者)로 등장한다. 지난 시대의 상습적인 고향타령은 이제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것이 시의 깊이보다 넓이 쪽으로 기울어지는 함정이 되기로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쪽의 경향들이 더 바람직할 가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시의 길은 세상 안에서나 자아 안에서나 쉬운 노릇이 아니다.

예선작의 소감이 더 있다. 첫째 어떤 작자의 태도가 자신의 언어를 불손하게 다루고 있는 사실이다. 토속말로 우자부리는 수작이었다.

이런 현상 말고도 의식과잉이 자주 보였다. 그 과잉이 현학적인 기분이나 내고 있을 때는 눈살을 찌푸리게 될 만하다. 20세기 모더니즘 공과론에서 과(過)쪽에 속할 것이다. 지적인 분식은 어떤 경우에는 시 속의 죄악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월과 백석으로 돌아가라는 정서소급을 위한 독려가 옳다는 것도 아니다.

이것저것 고르고 고르다가 6편이 남았다. ‘일출역동기’, ‘꿈의 잔영’, ‘내 데칼꼬마니’, ‘어머님, 그 해 가을은 행복했습니다’, ‘엇갈림’, ‘몸뻬바지’, ‘바람의 사슬’이다.

'일출역동기’는 비교적 탄탄한 구문으로 되었다. 하지만 시가 표현이 아니라 해설이 될 위험이 있다. 긴호흡은 장점이다. ‘꿈의 잔영’, ‘내 데깔꼬마니’는 시의 맛을 터득한 작품이다. 앞으로 시인생활이 보장되는 그런 작품이다. 다만 치열성이 뒤따라야겠다. ‘어머님, 그해 가을은 행복했습니다’는 풍성한 울림을 가진 작품이다. 그리고 쉽다. 서정의 힘은 지식의 조각 나열 따위나 은유의 자폐증 따위를 벗어난다. 하지만 어딘지 빈곤하다.

'엇갈림’과 ‘몸뻬바지’, ‘바람의 사슬’은 서로 겨룰만한 것들이다. 셋 중의 어느 하나를 고르기가 망설여졌다. 그럼에도 우리 동시대의 처절한 삶의 비극성 도출에 방점이 찍혔다. 물러선 두 편의 작자는 이번 말고 다른 기회에 세상의 문을 두드릴 것을 바란다. ‘바람의 사슬’의 실감이야말로 이 시대의 시적 절실성이다. 당선을 축하한다.

고은

 

 

 

2014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알 / 박세미

 

처음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른다

지나가던 개가 아무렇게나 싸놓은 똥처럼

거기엔 무단 투기 금지라고 쓰여 있었는데

나는 당당했지

버려진 적 없으니까

어느 날 거기 옆에 쪼그려 앉아 말했다

누가 널 낳았니

이름이 없어 좋겠다

털이 있다는 건 위험한 일이지

정체가 발각되는 것이니까

집을 나오는 길

두 발이 섞이는 것 같았다 그 다음엔 얼굴과

머리카락이 엉키고

몸의 구분이 모호해질수록

흩어져 있던 영혼의 조각들이 뭉쳐질수록

나는 아무렇게나 던져진 쓰레기로 완성되었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도 내 정체를 모르고

아무도 나를 분류하지 않는 곳

껍질을 깨고 안으로 들어간다

자, 이제 신앙에 대해 말할 수 있지

바깥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

한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것

욕조 안으로 들어가면

반쯤 잠기는 몸

최초의 기분은 여기에 있지

출렁인다

다리 하나가 기어나간다

 

심사평

 

"세계를 향한 끝없는 질문과 대화의 자세 돋보여"

본심에 올라온 10명의 작품은 예심위원들의 젊은 안목 덕분에 정형화된 신춘문예 스타일과는 다른 개성적인 목소리가 많았다. 그래서 우리의 심사는 한 편의 ‘잘 빚어진 항아리’를 선택하기보다는 세계에 대한 ‘개성적 독법과 화법’을 찾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여러 번 읽는 과정에서 수사적인 표현에만 의존한 시, 지나치게 관념적인 시, 낯익은 발상에 머물러 있는 시 등이 우선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남겨진 것은 박세미, 김잔디, 이현우의 작품이었다.

김잔디의 시는 이미지를 조형해 내는 솜씨가 섬세하고 감각적이라는 점에서 호감이 갔다. “풍경을 의심하는 초식동물의 눈은 까맣다”라든가 “우유곽 바닥을 훑는 빨대 소리에 놀라 수목은 뿌리를 내리고” 등 매력적인 구절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과 이미지들이 파편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뚜렷한 구심을 형성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이현우의 시는 상상력이 활달하고 다양한 소재를 유니크하게 소화해 낸다는 점에서 범상치 않은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여겨졌다. 실러캔스, 달의 착란, 손금의 태계, 프로토아비스…. 그는 무엇이든 시로 만들 수 있지만 어떤 시에도 자신을 전폭적으로 걸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소재주의적 경향이 그의 유창함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망설이게 했다.

박세미의 시는 간결한 언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증폭시켜 내는 특유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비극적 인식을 경쾌한 어조로 노래하는 그는 시적 대상의 슬픔과 고통을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끌어안는다. 당선작인 ‘알’에서도 버려진 존재들에 대한 상투적 연민이 아니라 “껍질을 깨고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새로운 난생설화를 탄생시킨다. 화자의 교체나 장면의 전환을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행과 연을 조율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세계를 향해, 바깥을 향해, 끝없이 질문하고 대화한다. 그 질문과 대화의 자세로 오랫동안 좋은 시를 쓸 것이라 믿고, 또한 지켜볼 것이다.

심사위원 : 나희덕(시인), 황현산(문학평론가)

 

 

 

2014년 《영남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피운다는 것은 / 송지은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어둠이 찰지게 들어있는 방에서 꽃은

게으른 손목에 잡혀 나오지 못하고 있다

물이 스민 계절은 부풀고

어디에도 합류하지 못한 이력서 같은

천리향 나무 잎사귀 몇 장이

형광등 불빛에 말라 떨어지고 있다

손톱만한 잎사귀의 먼지를 닦아내면

바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다

목마름을 견디며 버틴 푸른 힘줄이 보인다

비정규직 자리에 새 흙을 끌어와 분갈이를 한다

온도가 상승하면서 나무에 물이 오르면

꽃잎 하나가 어둠을 빠져나와

봄의 이마에 붉은 웃음을 낙점하고 확대한다

살아있는 동안은

누구에게나 꽃피울 자리는 있다

피운다는 것은 쓰러지기 위한 눈부신 허무

향기를 피우고

곰팡이를 피우고

바닥의 통증까지 밀어올리고나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도둑처럼 사라진다

피우는 것들은 모두

어둠을 본적지로 두고 있다

 

 

 

[2014 영주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가을, 낯선 도시를 헹구다 / 김지희

 

한잔 노동이 넘실대는 부엌에는

여자의 일생이 부조되어 있다

엄마 허벅지 베개 삼아 달게 잠들었던 소녀시절이

캄캄해 보이지 않는 새벽 어스름

잠든 아이의 꿈자리를 지나

슬그머니 부엌에 나가 불을 켠다

문득 완전한 어둠 속에 던져졌던 세상 한 곳이 환하다

옹이 박힌 가슴으로 숭숭 새는 물소리를 잠근다

부엌 속에 갇혀 맵고 짜고 달고

가끔 바삭바삭 타는 소리 너머

나는 세상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나온

존재하지 않은 가을이었다

부엌에 앉아 작은 상을 성좌처럼 펴고

나의 언어를, 별을 찾다가 웅크린 어깨선이

어느 파도에 부딪혀 무너지는지 속이 거북하다

살다 남은 시간을 쪼개고

찬 손을 비비고

싱크대 속에 갇혀 몇 년째 속앓이 한 냄비를 닦고

예리한 어둠에 그을린 낯선 도시를 헹구며

깊은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세우고 국을 끓인다

파, 시금치 온통 날것인 것들이 불꽃으로 저를 살라

새로운 맛을 낸다

모든 사랑의 고통의… 뉘우침으로

한 그릇을 위한 부엌의 노동엔 어떤 해석도 필요치 않다

성찬식 밀떡처럼 작은 평화를 입에 물고

부조의 문을 밀고 나와

식구들의 잠든 귀를 깨끗하게 여는 저 폐경기의 새벽!

 

[시부문 심사평]

 

삶의 곡진한 국면과 신선한 이미저리의 조화

올해 마지막 수확을 거두고자 하는 의욕 덕분인지, 이번 영주 신춘문예에는 멀리 호주와 미국을 비롯 한국어의 영토가 펼쳐진 곳들로부터 많은 응모작들이 쏟아졌다. 문학적 열정으로 가득 찬 1천여 편의 작품들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며 선자들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응모작들의 분량도 예년에 비해 몰라보게 불어났지만, 문학적 성취의 경중을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시편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자들은 흔히 신춘문예 투라 불리는 지나친 수사와 단단하게 엮여 있지 않은 이미저리의 남발이 불거지는 시편들을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개중에 어떤 이의 작품은 명징한 이미저리의 구사에도 불구하고 시적 전개를 뒤에서부터 뒤집었더라면 더 효과적일 것 같기도 하였다. 그만큼 작자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작위적이고, 파편적인 사유가 팽배된 시편들이 적지 않았다.

이에 선자들은 시적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 분별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네 삶의 다양한 국면을 진지하게 담고 있는 시들, 시적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는 이미저리의 구사 능력, 사전적 의미를 넘어 사물을 다양하게 바라보는 신선한 시각을 가졌는가 등의 여부에 중점을 두어 본심에서 논의할 만한 작품들을 골랐다.

그 결과 김은정 씨의 <폭설>, 김곳 씨의 <읽어버린 길>, 이명옥 씨의 <구두코를 향하여>, 김지희 씨의 <가을, 낯선 도시를 헹구다> 등을 본심에 올려놓고 논의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사물을 새롭게 보게 하는 묘사력과 사전적 의미에서 벗어나 신선한 의미망을 환기하는 데 상당한 수준을 견지하고 있었다. 김은정의 작품들은 그 같은 점에서 주목이 갔지만 작자가 품은 세계관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고, 시상의 전개가 지나치게 작위적이어서 아직 착근이 덜 되었다는 데서 아쉬움을 남겼다. 김곳의 작품들은 이중적 의미망을 엮어가는 알레고리의 구사에 치중하였지만 모호하거나 충분한 전개가 되지 못한 채 마무리를 서두르는 미숙함을 노출하였다. 이명옥의 작품들은 해체적이면서도 명징한 이미저리들이 돋보였지만 현실과의 긴장 관계가 이완되어 그 절실함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다.

김지희 씨의 작품들은 여성의 삶의 무대인 살림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한 사려 깊은 천착에 바탕해 있다. 피로를 유발하는 도로를 넘어 화자를 참인간으로 재탄생하게 하며, 나아가 식구들의 건강하고 밝은 삶을 묵묵히 뒷받침하는 사랑의 정신을 담지하고 있다. 그것들이 과하지 않은 이미저리를 동반하여 처리되고 있는 점들이 주목을 끌었다. 몇 군데 매끄럽게 다듬어지지 않은 산문적 잔재와, 다소 부족한 정적(靜的) 모티프 들이 선자들의 아쉬움을 자아냈다.

선자들은 본심에 오른 작품을 놓고 벌인 토론과 장고 끝에 최근 들어 지나치게 언어 유희와 낯선 상상력의 세계로만 치닫는 신춘문예의 병폐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에 따라 삶의 곡진한 국면들을 시의 그릇에 담아내면서도, 명징한 이미저리의 강구를 통해 사상(事象)들에게 새롭게 접근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점들을 사서 김지희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기로 하였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과 함께 앞으로의 정진과 분발을 당부하며, 아울러 이번에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이들도 더욱 정진하여 새로운 기회의 문을 활짝 열기 바란다.

심사위원 : 박몽구(시인, 글), 변종태(시인)

 

▲ 김지희 씨(시 부문 당선자). / [당선소감]

 

“시를 결코 허욕과 명예의 도구로 이용하지 않았다. 시라는 견고하고 딱딱한 옥석을 말없이 석수장이처럼 갈고 닦는 일만을 했을 뿐이다” -발레리

새벽녘 ‘별’을 가지고와 ㄹ을 갈고 갈아 ‘벼’를 만들기도 해보지만, 과연 나는 시를 쓰며 ‘시라는 옥석을 말없이 석수장이처럼 갈고 닦는 일만을 했을 뿐’ 이렇게 말 할 수 있을까? 늘 반문한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보다는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보며 언어 속에서 마음의 극치를 누리고자 했다. 그러나 언제나 나의 언어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고 안으로 갇혀 캄캄한 바위 속 소통할 수 없는 무늬만 그리고 있었다. 노을이 모닥불처럼 피어, 식어가는 12월을 태우는 거리 크리스마스 캐롤이 어느 상점에서 흘러나온다. 절망도 경쾌하게….

낡은 전통에 매달려 있는 언어를 지우고, 손 끝마디로 새겨 넣은 뿌리로, 달의 큰 통 안에 있는 여자로, 투명한 모음들이 풍선처럼 솟아오르는 언어로, 겨울 가로수 가지 끝에 걸린 새벽별로… 말없이 견고하고 딱딱한 시라는 옥석을 석수장이처럼 갈고 닦을 것이다. 이번 겨울이 지독하게도 따뜻하다.

 

약력: 성주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 수료

 

 

 

2014 중앙신인문학상당선작

 

옆구리를 긁다 / 임솔아

 

빈대가 옮았다 까마귀 몇마리 쥐 한마리를 사이좋게 찢어먹는 걸 구경하다가 아무 일 없는 길거리에 아무 일 없이 앉아

있다가 성스러운 강물에 두 손을 적시다가 모를 일이지만 풍경의 어디선가

빈대가 옮았다 빈대는 안 보이고 빈대는 안들리고 빈대는 안 병들고 빈대는 오직 물고 물어서 없애려 할수록 물어뜯어서 남

몰래 옆구리를 긁으며 나는 빈대가 사는 커다란 빈대가 되어간다

비탈길을 마구 굴러가는 수박처럼 나는 내 몸이 무서워지고 굴러가는 것도 멈출 것도 무서워지고

공중에 가만히 멈춰 있는 새처럼 그 새가 필사적으로 말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처럼 제자리인 것 같은 풍경이 실은 온 힘을 다

해 부서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모래들이 있다

빈대는 나 대신 나를 물어 살고 빈대는 나를 물어 나 대신 내 몸을 발견한다 빈대가 옳았다 풍경을 구경하다가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뇌태교의 기원 / 이소연

 

은빛 잠을 수집하는 뇌의 바깥에는 조용한 산책과 쇼팽의 음악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세계의 관념으로 머리카락이 자라는 시간을 좋아해요 덩달아 창을 물어뜯는 별자

리의 감성을, 나무 위에 앉은 곤줄박이의 감정을, 마당 앞의 바위의 감상을 좋아해

요 그때 뇌는 주글주글한 감성과 지성을 가공하고요 나는 뜨개질 가게를 드나들기 시

작합니다 바늘 코에 걸린 실 한 가닥으로 일요일 붉은 공화국에 대해 점을 치는 거

죠 그러나 굴뚝이 아름다운 공장지대로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 피해야

해요 뇌는 풍경을 쪽쪽 빨아 먹고 조금씩 단단해지거든요 참 연한 아메리카노 한잔

을 마시면 뇌가 더디게 어제의 풍경을 음미할지도 몰라요

뇌를 호두알로 생각하면 위험해요 뇌는 오 분간의 육류를 꼭꼭 씹는 것을 황홀해해

요 하지만 나는 핏줄과 신경, 눈 코 입을 위해 십 분간의 채식을 하지요 식물성은

아이의 성격과 눈동자의 색까지 결정하니까요

나는 감상적인 욕조 속에서 돌고래들의 꿈을 꾸고, 뱃속의 아이는 벌써 뇌태교의

기원을 생각하는지 양수를 동동 차네요

 

당선소감

 

"출산 통해 한단계 더 성장"

시는 가슴을 통해서 몸으로 온다. 내 몸에 잉태된 시만이 다른 나를 뱉어낼 수 있었다. 하나의 사물을 가지고, 그러니까 시가 되고 싶은 이미지를 품고 끙끙 앓지 않고서는 단 한 줄의 시도 쓸 수 없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 나는 시를 잉태하는방법을 잘 몰랐다. 그런 면에서 단 한 번의 임신과 출산이 나를 자라게 했다고 생각한다. 정말 목이 빠져라 기다렸던 당선 소식이다. 초·중'고를 거쳐 대학과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나는 문학만 공부했다. 그런데 시인이 되는 길은 아득하기만 했다. 자주 나약해졌고 잦은 패배감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는 동안 나는 좀 단단해졌던 모양이다. 이제는 두렵지 않다. 거침없이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

나의 따뜻한 지도교수이신 박철화 선생님과 이승하 선생님을 비롯해 중대 문창과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내가 쓴 허접한 소설을 읽어주셨던 정지아 선생님과 신상웅 선생님께는 면목이 없다. 그리고 사랑한다. 문우들은 내 전화를 받아준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받아줬다. 정말 고맙다! 다들. 당선 소식에 나보다 더 기뻐해준 전인철 선생님과 양가 부모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나의 사랑스러운 ‘1쇄 시인(아직 1쇄밖에 찍지 못한)’ 이병일과 아들 서진이에게 오랜만에 곰국을 끓여 먹이고 싶은 저녁이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시를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을 구원자라고 불러본다. 청년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지치지 않고 쓰겠습니다.

 

경북 포항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학·석사

 

심사평

 

음악이 깃든 전언과 정교한 문장 매혹적

나이 제한 탓에 응모작품 수는 여타 신춘문예에 비해 많다고 할 수 없었으나 뛰어 작품들은 절대 적다고 할 수 없었다. 김선욱, 김선화, 박명린, 박세랑, 이소연, 임소라, 정수미의 시를 두고 고심한 끝에 최종적으로 다음 세 명의 작품을 두고논의했다.

박명린의 ‘쑥 인절미’ 외 4편은 순결한 청춘의 기록이다. 자신을 ‘그대’에게 줄 인절미에 빗대는 마음이 그렇고, 밀어(密語)를 밀어(密魚)로 바꾸는 변환이 그렇고, 고백을 사랑과 동일시하는 시선이 그렇다. 그런데 청춘에는 본래 비교급이 없어서 자신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감상과 과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는 뜻이다.

김선화의 ‘홈리스 소행성’ 외 4편에는 단정한 말들 속에 풍요로운 사연을 쟁여 넣는 솜씨가 있었다. 사물들이 제 사연을 얘기하기 시작하면 시는 이미 다른 세계에 가닿아 있다. ‘빛의 샤워’ 같은 작품은 이 응모자가 풍경과 사연의 이질동상(異質同像)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말들이 제가 가야 할 마지막 경지까지 가지 못했다. 결구 앞에서 자꾸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곤 했는데, 이 점만 보완한다면 곧 다른 지면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소연의 ‘뇌태교의 기원’ 외 4편은 단번에 심사위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음악이 깃든 전언은 아름답고, 정교하게 구축된 문장은 매혹적이었으며 다양하게 변주되는 어조는 화려했다. 그러면서도 과장도 과소도 없이 제가 가야 할 사유의 목적지에 정확히 이르고 있었다. 시편들이 고른 성취를 보이고 있는 점도 신뢰할 만했다. 좋은 시인을 만나게 된 기쁨이 크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최승호·김기택·권혁웅

 

 

 

 

 

 

 

 

출처 : 유당넋두리
글쓴이 : 유당(裕堂)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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