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문학의 향기(공부방)

시평

언어의 조각사 2014. 2. 11. 09:36

벗는다, 벗어난다, 사라진다,

양경언

 

오 그대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로서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라짐에 대한 고뇌가 그의 가슴을 죈다 하더라도.

한편 그의 말은 이곳을 이어 가고,

그는 이미 그대들이 함께하지 못하는 저곳에 있으니 ……

- 릴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중에서

 

‘사라짐’에 대해 생각한다.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사라져가는 에우리디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의 막막함에 대해 생각한다.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의 감정이 순간을 지배했으리라. 그러나 한 편 누군가의(혹은 무언가의) ‘사라짐’ 이라는 상황에 내던져진 자들의 황망만큼이나 속수무책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누군가(혹은 무언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에게 저 자신의 몸이 사라지는 순간 어떤 마음을 남기고 싶어 했을까. 감히 표현하기가 어렵다. 단지 그 이후, 숲의 빈자리들에는 허공과 오르페우스의 노래만이 남겨져 상실의 윤곽을 더욱 뚜렷이 하는 상황을 우리는 목도할 뿐이다.

‘사라짐’은 상황이다. 사라지는 자와 사라짐을 감당해야 하는 자, 이들의 관계가 ‘사라짐’이라는 상황을 형성하는 것이다. 때문에 ‘사라짐’은 사건으로서 언급이 되어야 한다. ‘사라짐’ 자체에 대해서는 끝끝내 말로 표현할 수 없겠지만, 그 이후에는 무언가의 ‘고였다가 간’ 흔적과 그 흔적이 머무는 자리의 사물들이 품고 있는 ‘허공’으로 사건에 대한 추적이 가능할 것이다. 블랑쇼는 릴케의 시 속에 등장하는 오르페우스를 통해, ‘시적으로 말하는 것과 사라진다는 것은 같은 움직임의 깊이에 속한다’고 했다. 에우리디케의 사라짐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 오르페우스는 이전과 결코 같을 수 없었고, 결국 갈기갈기 찢기는 소멸을 맞아야만 했다. 그 스스로도 노래를 하면서 자신의 온 몸이 사라져야한다는 사실을 예감했을 것이다. 시 속에서 소멸된 오르페우스는 이제 우리 앞에 없고, 그의 노래만 남았다. 어쩌면 시인은 시 속에 고유한 사라짐의 자리를 마련하고 우리를 그 지점으로 이끄는 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라짐, 말할 수 없는 그 지점에 머무는 허공,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남겨진 어떤 흔적들, 자취들. ‘사라짐’의 경험을 관통한 이후에 남겨진 풍경이 밀려오는 자리에, 장요원의 시가 있다. 무엇이 왔다가 갔을까. 무엇이 ‘여기’라는 외피를 벗고, 저 멀리로 벗어났을까. 장요원의 시와 마주할 때, 우리는 노래만이 남아 상실의 윤곽을 더욱 뚜렷이 하는 상황으로 금세 이끌려 간다.

 

 목백일홍의 기침 소리가 고였다 가고

 가을비의 헐어진 귀 한 쪽이 

 찡그린 바람의 이마가 고였다 간다

 나무들마다

 붉거나 아릿하거나 혹은 시큼한 계절이 고였다 갔을 것이다

 

 밤새 고여 있어도 부패되지 않을 울음으로 전이된다

 울음은 어둠을 구부리고

 둥둥 떠 있는 눈꺼풀은 동공의 각을 늘린다

 

 한 女子가 고였다 간다

 

- 「고여 있는 잠」부분

한 여자의 장례식장 풍경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뚱어리를 벗어나 사라진 자리를 보며 시적 화자는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 남아있는 육신은 아무것도 아닌가. 한 때 살아서 ‘환하게 웃던’ 표정은 검은 리본이 둘러진 영정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나. 그렇다면 여자의 무엇이 이 생(生)에 머물다 간 것인가. 여자가 자신의 생을 벗어난 자리에 ‘목백일홍’과 ‘가을비’, ‘바람’이 한 번씩 ‘고였다 간다’. 이들의 무엇이 자국을 남기는지가 중요하다. 모두 어딘가가 구겨진 채로 불균형한 모습을 남기고 갔기 때문이다. 그 불완전한 자국들이 모여, 여기에 머물다간 누군가를 어렴풋하게 깁기(quilting) 시작한다. 이를테면 눈에 보이지 않는 ‘목백일홍’의 ‘기침 소리’와 ‘가을비의 헐어진 귀 한 쪽’, ‘찡그린 바람의 이마’ 가 그 자리에 ‘고이면서’, 육신만으로는 오롯이 완성될 수 없는 한 사람의 생이 풍경에 자리하게 된다. 사라진 ‘한 여자’의 자취가 남는 것이다. 이는 요컨대 여자의 장례에 모여든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들이 여자가 사라진 사건성을 드러내면서, 한때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여자에 대한 상상적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 때, 여자를 잃은 이 생의 사람들은 사라진 여자에 대한 애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라진’ 무언가를 더욱 상기하게 하는 시다. ‘부패되지 않을 울음’이 남아 여자를 애도할 때, 우리는 어쩌면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진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줄기가 체위를 바꿔가며 소리를 먹는다

 

 사.랑.한.다가  퉁퉁 불어 § Å ¿ ㎕ ‰ ¿ 로 떠다닌다

 

 소리들을 잔뜩 먹고 거품들이 부푼다

기억이 터져 사라지면 새로 익사할 문자가 부풀어오른다

 

창 밖 하늘이 낮게 내려온다 

 거품처럼 구름들이 부푼다

 문득

 저 구름 속으로 들고 싶은, 소리의 기억을 건져내기 전 

 신나게 돌고 싶다

 탈수된 구름들이 콸콸콸 쏟아질 것이다

   

   

 음각音覺을 잃은 소리의 혀들

 소리들이 저를 벗어버린 껍질들

 

 몸들이 다 빠져나간 시간,

- 「기억이 풀어지는 시간」부분

빨래더미와 함께 세탁기 속에 들어간 휴대폰이 울리면서, 옷 속에 휴대폰과 함께 숨겨두었던 기억들이 ‘풀리고’ 있는 상황이다. ‘나’를 표현하던 하루 동안의 옷들은, 나의 몸이 빠져나간 뒤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한낱 세탁기 속에서 돌아가는 빨래더미들 따위에만 의존해 ‘나’를 표현했던가. 하지만 ‘나’는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기억과 숨기고 싶은 수치와 나에 대한 변명을 둥근 물살이 신나게 돌리는 옷들 구석 구석에 구겨 넣었었던가. 몸들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야 그게 다 보인다. 옷 주머니에서 딸려 나온 휴대폰의 ‘소리’가, 옷들이 구겨진 사이로 보이는 ‘§ Å ¿ ㎕ ‰ ¿ ’과 같은 자국들이, 거품들과 함께 부풀어 오르기도 하고, 떠다니기도 하면서 사라진 몸의 흔적을 대신한다. 옷을 벗은 이후에야, 몸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야, 몸이 관계했던 바깥의 세계가 한 줌의 충만한 내면으로 변형되어 세탁기 속에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위의 시는 특히나 5연 3행의 “문득”이라는 시구를 통해, 세탁기 속의 회전이 방향을 갑자기 반대로 튼 듯 하는 리듬감을 형성한다. 이 멈칫한 순간은, ‘사라짐’의 사건이 끝내 남기고 가는 것은 사라짐을 예증하는 흔적들임을 알리는 때이다.「고여있는 잠」과는 다르게 ‘사라짐’이라는 상황에 내던져진 무언가들을 더욱 상기하게 하는 시인 것이다. ‘음각을 잃은 소리의 혀들’과 ‘소리들이 저를 벗어버린 껍질들’이 콸콸콸 쏟아질 때, 우리는 어쩌면 사라지고 난 이후에 남겨진 것들을 비추는 태도야말로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몸짓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장요원의 시들에선 유독 부재하는 것들에 대한 응시가 깊다. 가령 다음의 시를 보자.

 

헐거워진 벽에 매달린 뻐꾸기 둥지에는 알이 없다

 울음이 열릴 때마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시간들만 튀어나온다

 고개를 내밀고 우는 저 환지통

 목청이 터질 때마다

 늙은 시간들이 사라진다

 

…(중략)…

 

 이미 떠나간 시간들, 낯설지 않은 울음의 횟수가 집안을

울린다

 시간이 날아다니고

 부화되고 있는 숲이 뒤척이고 있다

- 「숲」부분

시적 화자의 눈은 비어있는 둥지에서 온 뻐꾸기의 습관적인 알림을 향해 있다. 뻐꾸기시계에는 부화할 알이 없다. 불모의 시계가 울릴 때, 살아있는 것에 대한 욕망이 부재하는 우리의 하루가 시작된다.

그러나 텅텅 비어있는 느낌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울음은 생명이 없는 둥지에 오래 쌓여있던 시간들 역시도 사라질 때, 그때서야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늙은 시간들’이 벽에 매달려 있는 뻐꾸기시계를 벗고, 헐거워진 벽에서 벗어나 이윽고 사라지는 그 자리에 우리들의 울음이 스민다. 뻐꾸기의 알림이 알이 없는 둥지로부터 출발했음에 주목해야 알 아 챌 일이다. 어떤 부재에 대한 응시는 때론 ‘부화’를 꿈꾸게도 한다. 다음 시의 경우는 어떠한가.

 

걸음 안에는 허공이 들어 있다

 

뒤집혀 있는 저 걸음에는

절뚝거리던 길들이 끌고 다녔을 몇 켤레 구름들이 접혀 있을까

어쩌면 걸음은

허공을 신고 다니는 일이 전부인지도 모른다

 

온종일 끌다 벗어버린 그믐달의 뒤축이 부어 오른다

 

아코디언처럼 접히고 휘어진 길이 늘어났다가 줄어들 때마다 

허파가 새어나오는 걸음이

밤새 자라고 있다

- 「허공 한 켤레」부분

신문지 몇 장을 덮고 자는 어느 ‘절름발이’의 두 발에는, 그이가 온종일 감당했어야 할 비척이는 걸음과 기울어진 계단, 크락숀 소리의 도촉으로 허둥지둥 건넜을 횡단보도에서의 다급함이 머물러 있다. 하지만 누가 알까. 그것들은 모두 우리 눈에는 당장 보이지 않는 경험아닌가. 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이미지들이 ‘허공’이 바치고 있는 두 발에 들어있다. 누군가의 눈에는 의도적으로 배제된 시적 대상의 하루 족적이 허공에 놓인 두 발을 통해 그려진다. ‘온종일 끌다 벗어버린 그믐달’ 같은 ‘뒤축’이라는 자취가 사라졌던 ‘절뚝거리는 길들’을 예상하게끔 하고, ‘뒤집혀 있는’ 두발이라는 흔적이, 절뚝이는 걸음과 거리가 마찰을 일으킬 때마다 발끝에서 소리가 새어나왔을 것이라 짐작하게 한다. 당장 보이진 않는다 하더라도 두 발의 걸음이 만들어낸 소리는 마치 ‘허파’를 내장하고 있는 것 마냥 숨소리로 치환되어 들리는 것이다. 그 끈질긴 생명이 ‘밤새 자란다.’ 허공이 그를 지키고 있으므로 그 자의 삶은 눈물겨울지언정, 계속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장요원의 시 곳곳에 자리한 부재에 대한 응시는, 사라짐 이후에 남겨진 흔적들을 좇으면서 새로운 무언가의 생성을 준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빵빵하던 이팝나무들이

  끈만 남겨진 채

  푹,

  꺼져 있다

 

  쭈글쭈글한 바람이 펴지려고 나무의 그늘이 가렵다

 

  숨을 뒤척이는 바람의 발아,

 

  여름은 온통  코를  땅에 박고 숨을 불어댔지

  바람이 쑥 쑥 자라났고

  우리의 폐는 그늘처럼 커졌어

 

  가끔, 커다란 허파를 가진 바람이 공중으로 날려 보내려고 안달이 났지만 

  끝내

  주둥이를 놓지 않았지

 

  우리가 마주보고 스틱을 휘휘 저을 때면

  카푸치노처럼 점점 부풀어 올랐지

푹 푹 꺼졌지

  가을은 어지러움증을 앓았고

  허공의 손톱은 

  자꾸만 까칠해졌지

  

  어둠이 불어놓은 태양이

  빈 끈에 매달려 있는 아침,

  주저앉은 둥그런 그늘이 일어서고 있다

        

             -「풍선들」전문

 

계절에 따라 생명이 소멸하기도 하고 소생하기도 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이팝나무의 너무나 당연한 주기를 따를 때야, 사라짐의 사건을 형성했던 누군가(혹은 무언가)들이 이끄는 소멸의 지점이 실은 생성의 예고 지점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팝나무들이 푹, 꺼지면서 ‘쭈글쭈글’하게 말라가는 계절에는 풍성했던 기운이 사라진 나무의 빈 가지 사이를 바람이 불며 다음의 소생을 알린다. 들숨의 시간이다. 빈 가지 사이를 오가며 바람이 쑥쑥 자라나고, 어느덧 여름이 되면 이팝나무의 잎은 다시 풍성해진다. 날 숨의 시간이 온 것이다. 이 호흡은 눈에는 보이진 않지만, 생명을 추동하는 하나의 힘이다. 그래서인가. 눈앞에 그늘이 풍성한 모습을 상실하고 주저앉는다 해도 어쩐지 그 풍성함의 사라짐은 또 다른 무언가로 이행할 것만 같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남겨진 오르페우스의 노래는 상실의 윤곽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한 편 그의 노래로 숲은 끝없는 생성과 활기를 예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장요원의 시를 마주하고 나서야, 이해한다. 시는 다만 대답의 부재임을. 사라짐, 말할 수 없는 그 지점에 머무는 보이지 않는 것, 남겨진 흔적들, 자취들을 애틋하게 좇으며 끝없이 질문을 여는 행위임을. 때문에 ‘사라짐’의 상황이 마련되는 시적 현장에서, 우리는 언제나 공허의 시간을 경험하며 동시에 그 공허와 관계하고 있는 흔적들로부터 삶의 자취를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 “과거의 공허와 미래의 공허가 진정한 현전이 되는 순수한 말”들이 있다고 믿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니 오르페우스여, 슬퍼하지 말기를. 그 황망함의 곁에 서서 ‘사라짐’이라는 사건을, 우리는 내내 되새길 터이니. 당신의 소멸 역시도, 잊지 않고 함께.

 

■ 양 경 언

* 주요약력 : 1985년 제주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2011년 《현대문학》문학평론 부문에 「참된 치욕의 서사 혹은 거짓된 영광의 시 : 김민정론」이 당선되어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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