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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의 무렵외1 / 김경주

언어의 조각사 2010. 1. 23. 20:00

바늘의 무렵 / 김경주

 

 

  바늘을 삼킨 자는 자신의 혈관을 타고 흘러 다니는 바늘을 느끼면서 죽는다고 하는데

 

  한밤에 가지고 놀다가 이불솜으로 들어가 버린 얇은 바늘의 근황 같은 것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끝내 이불 속으로 흘러간 바늘을 찾지 못한 채 가족은 그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

 

  그 이불을 하나씩 떠나면서 다른 이불 안에 흘러 있는 무렵이 되었다

  이불 안으로 꼬옥 들어간 바늘처럼 누워 있다고, 가족에게 근황 같은 것도 이야기하고 싶은 때가 되었는데

 

  아직까지 그 바늘을 아무도 찾지 못했다 생각하면 입이 안 떨어지는 가혹이 있다

 

  발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알게 되면, 사인(死因)을 찾아내지 못하도록 궁녀들은 바늘을 삼키고 죽어야 했다는 옛 서적을 뒤적거리며

 

  한 개의 문(門)에서 바늘로 흘러와 이불만 옮기고 살고 있는 생을, 한 개의 문(文)에서 나온 사인과 혼동하지 않기로 한다

 

  이불 속에서 누군가 손을 꼭 쥐어줄 때는 그게 누구의 손이라도 눈물이 난다 하나의 이불로만 일생을 살고 있는 삶으로 기꺼이 범람하는 바늘들의 곡선을 예우한다

 

모래의 순장 / 김경주

 

모래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움직이고 있다

멈추어 있는 모래를 본 적이 없다

직경 0.8밀리미터의 이 사각의 유동이란

무섭도록 완강하고 부드러운 것이어서

몇만 년 동안 가만있는 것처럼 보여도

가장 밀도 높은 이동을 하고 있다

모래는 자신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조차 관심이 없다

자신의 흐름을 거부할 수 없는 유력으로

모든 체형을 흡수하고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간다

거미가 남겨 놓은 파리의 다리 하나까지도 노린다

모래가 지나간 곳에서는 무덤냄새가 난다

모래 속으로 천천히 잠겨 들어간 손을 보면

부드러움이 얼마나 공포일 수 있는지

이처럼 달콤한 애무 앞에서 저항이란

인간이 이해할 수 없었던 가장 아름다운 예의일지 모른다

모래는 순장을 원하는 것은 아닐까

모래는 스스로의 무덤을 갖지 못해

다른 것들의 몸을 빌려 자신을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만 년 전부터 떠돌고 있는 자신의 무덤을 찾기 위해

자신의 유랑 속으로 끝도 없이 다른 것들을 데려가는 것은 아닐까

 

한 번도 자신의 무덤을 가져 보지 못한 모래들이

무수한 무덤을 만들어 내는 노래는 무섭고 서글픈 동요에 가깝다

 

이 별은 그 모래들의 무덤들을 기록하는 시간들과

그 모래에 잠겨 허우적거리던 눈이 큰 곤충들로 구분된다

때로 기이한 문장에도 이런 알 수 없는 모래가 흐른다

문장 속으로 모래들이 차오르고

이윽고 두 눈이 모래 속으로 잠겨 들어간다

모래가 빠져나갈 때가 되면

모래의 신체로 변해가는 언어 속에서

몇만 년 전 자신의 눈이 되었어야 했을 생물을 발굴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모래 속에 잠긴 손을 꺼내 이렇게 다시 쓴다

 

인간을 닮은 문장은 수의를 여러 번 바꾸었지만

모래를 닮은 문장은 모든 것들에게 스르르 수의를 입힌다

 

운이 좋으면 삶은, 수의를 입은 채 흘러가는

여러 개의 유역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문장은 차곡차곡 자신에게 흘러온 모든 언어들과 함께

순장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

기이한 균형으로

나른하게…

사라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시집<시차의 눈을 달랜다> 제28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사

 

  김경주시인: 1976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와 『기담』이 있으며,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과 제28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