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보물창고

고래를 기다리며외2/이사랑

언어의 조각사 2010. 1. 23. 20:55

고래를 기다리며 외 3편 / 이사랑

 

땅 속 깊은 곳

그곳엔 꿈에서 만난 푸른 고래가 살고 있다

고래가 지하 땅 속으로 이동해 왔다는 소식은 지금껏 없었지만

나는 그를 고래라고 부른다

(누가 장생포에서 고래를 기다리는가)

어제 저녁에도

수백 미터 지하에서 요나처럼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는 멀쩡히 살아나왔다

밀물과 썰물의 경계인 세상 바다에서

먹이를 통째로 삼켰다가 고스란히 지상으로 토해내는

이제 고래는 바다의 동물이 아니다

앞만 보며 힘차게 달리는 고래

망망한 바다에서 섬으로 떠다니다가

육지로 돌아온 너는 포유류

금속으로 진화한 것이 분명하다

한 발 물러서라

우르르 지축을 울리며 파도가 밀려온다

미래로 꿈을 실어 나르는 푸른 고래가

지금,

상록수역을 향해 초고속으로 달려온다 

   

만두를 빚으며 / 이사랑

 

섣달그믐 날

밀가루 반죽처럼 만두소처럼

찰지게 섞여서 살자며

세 동서가 모여 자기 모습대로 만두를 빚는다

소리 없이 끓는 남자와 살면서 뽀글거리는 여자들

해묵은 불평과 불만 칼도마에 올려 다지고

꼭꼭 쥐어짠 뒤, 팍팍 치대고 나긋나긋 주물러

만두소와 피를 만든다

조심!

흩어진 가족들 뭉치고 섞일 때

가슴에 담고 속 터질 일 없도록, 그래

나를 곱게 접어 전부를 감싸는 일이지

입술은 얌전히 다물고 귀는 정성스레 모아야지

일 년에 꼭 한 번은

나를 반죽하고 다져서 곱게 빚은 다음

푸욱 쪄야 해

암만 그래야지

만두가 수다스런 내 입을 꽉 틀어막는다.

 

                                               

박꽃 / 이사랑

 

우리 집 초가지붕 위에는

그믐밤에도 박꽃이 피어 환했다

밤마다 아무도 몰래 하얀 꽃이 피더니

보름달이 딱 여섯 덩이 열렸다

아버지는 산바라지 하듯 정성스레 만삭의 달을 하나씩 따다가

반으로 쪼개면 반달 속에서 박 속 같은 웃음이 쏟아졌다

팔 뻗으면 손이 닿는 처마 밑에는

식솔들이 고드름처럼 열려

대들보에 집을 지은 제비네 식구들과

바람벽을 사이에 두고 한 지붕 아래 살았다

어느 날 아침

첫사랑에 속울음을 울던 언니

베게 맡에 빈 약병 한개 얌전히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들판의 풀들을 손톱이 빠지도록 쥐어뜯었다

그밤 아버지는 달덩이 같은 언니를 달구지에 달달 태우고 가더니

산의 가슴팍에 바람도 모르게 묻었다

이듬해 달씨 받아놓고

달빛을 좇아 총총 떠나신 아버지

해마다 박꽃은 여전히 피고 피고 지는데

계절이 오가는 동안 다들 제 길로 떠난 뒤

매미 껍질처럼 고향집에 혼자 남은 어머니

아직도 가슴을 열고

언니 보듯 하얀 박꽃을 바라보신다

 

<우리詩> '신작소시집'에서

 

 

이사랑: 전주 출생.

2009년『다시올문학』으로 등단.

제11회 수주문학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