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보물창고

기타 등등/김경선

언어의 조각사 2010. 1. 23. 21:04

· 1 외 2편 / 김경선

 

 

  그 무리의 일부일 뿐 단 한 번도 지명 된 적이 없는 내 이름은 으깨지고 치대져 반죽이 된다 수많은 기타에 섞인 A나 B 혹은 C 등등, 나는 아름드리 그늘 뒤에 가려진 잡목, 잡초에 묻힌 들꽃, 언제나 나는 부록이다

 

  한때 주연을 꿈꾼 적 있지만 끝내 만약은 오지 않았다 덤으로 대충 넘어가는 나날이었다 이름 없는 배우의 연기처럼, 이름 없는 가수의 노래처럼, 무명시인의 서러운 시집처럼, 나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어,

 

  누군가 삼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뒤에 내 입은 사라져버렸다 누군가 입을 달아주기 전까지 나는 삼류로 구별된다 무명과 삼류 사이를 오가는 동안 나는 거리를 배회하는 미아, 검색되지 않는 기타 등등으로 요약된다 

 

 

기타 등등 · 3 / 김경선

 

                             -그림자

 

작전개시!

나는 그를 따라붙는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종일 미행한다

그가 내 심장을 밟는다

밟혀도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

 

나는,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사철 검은 옷만 입는다

나는 모든 사물을 통과하고

몸을 수시로 늘리거나 줄인다

주위가 어두워지면 투명인간이 되기도 한다

 

그에게 나는,

슬픔도 고통도 없는 존재

내 발소리를 한번도 듣지 못한 그는

나를 봐도 금세 잊는다

내 음역에 들지 못한 그는

내 수신호를 깨닫지 못한다

 

나는 그늘 안에 잠든다

그의 영혼에 세들어 산다

그는 단지 내 껍데기에 불과하다

 

나를 그림자라 부르는 그를

나는 껍데기라 부른다

우리는 서로 착각하며 공존한다

 

늘은 햇빛을 불러 외출을 한다

내가 이끄는 방향으로 그가 발걸음을 옮긴다

 

 

                

 

기타 등등 · 4  / 김경선

 

                                   -방석 놀이

 

  어떤 녀석은 많은 돈을 지불하고 낙하산방석이 되었다 힘센 방석들은 맨 윗자리를 차지한다 밑에 깔린 방석들 산소부족을 호소한다 긴급 투입된 산소공급기도 맥을 못 춘다 비정규직연구소, 베트남 필리핀 중국 방글라데시에서 싼값에 방석을 다량 수입,

 

  거리, 거리 방석이 넘쳐난다 꽃방석들은 술집과 노래방으로 흩어지고 붉은 머리띠를 두른 낡은 방석들이 광장에 모였다 방석 하나가 제 몸에 불씨를 붙인다 젖은 방석의 매캐한 연기가 목젖을 누르며 타오른다

 

  편파적인 일조량, 적색경보는 해제되지 않는다

 

  물속으로 방석 하나가 던져진다 한강을 찾는 방석들이 늘어나고 둔치에 벗어 놓은 신발이 발견되었다

 

  방석들이 밀거래되고 약삭빠른 방석은 적색 띠를 피해 청색 띠를 어깨에 둘렀다 잠들지 못하는 하청업자들이 조는 틈을 타 카시미론 솜을 취해간 대규모 방석공장 여전히 성수기다

 

  김경선 시인

 

인천 옹진군 출생

2005년『시인정신』으로 등단

웹월간詩 『젊은시인들』편집장

‘젊은시인들’ 동인

제10회 《수주문학》우수상 수상

 
 

[시인의 말]

 

전복을 꿈꾸며

 

  관념을 뛰어넘어 전복을 꿈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나는 주류와 비주류는 언제고 전복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주류와 비주류가 왜 구분이 되어야만 했을까. 나누기 좋아하고 위에 서길 좋아하는 사람들의 관습이 만들어낸 잣대는 아닐까.

 

  어디에서도 검색되지 않는 기타 등등,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이 세상은 주연보다 조연이 많고 조연보다 더 많은 것이 엑스트라이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존재한다면, 소수는 다수의 존재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내게 있어서 시 작업은 관념을 뛰어 넘는 일이었다.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관념에 발목이 잡혀 자유롭지 못했고 틀에 박히고 구태의연한 언어들 속에서 뒹굴었다. “기타 등등”을 쓰면서 들이대는 잣대의 원천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발견했다. 세상에는 많은 편견의 잣대가 선악을 가르는 일들을 하는데 모든 관념을 탈피했을 때 사회적 통념을 넘어 비로소 자유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 작업은 내게 자유로운 영혼과의 소통을 추구하게 한다. 오늘도 내일도 또 다른 관념은 나의 발목을 붙들겠지만 나는 다시 전복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