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문학의 향기(공부방)

*시적인 생각 찾기* 안도현

언어의 조각사 2009. 12. 28. 23:34

시적인 생각 찾기 / 안도현

 

   1.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시를 쓰려는 당신에게 색다른 세 가지를 주문하려고 한다.

첫째,

술을 많이 마셔라.

그렇다고 혼자 마시면 안 된다. 술이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매개이지 주정을 부리기 위한 약물이 아닌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당신은 지루한 일상 너머를 꿈꾸는 행운을 얻을 수도 있다. 함께 마시는 사람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도 있다. 시인은 일상이라는 유리그릇을 박살내는 자가 아니다. 유리그릇에 다만 빗금을 긋는 자임을 명심하고 마셔라. 한 편의 시를 쓰려거든 백 잔의 술을 마신 다음에 쓰라. 그렇다고 해서 술이 깨지 않은 비몽사몽의 시간에 펜을 잡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은 있어도 ‘취중진문’이라는 말은 없다. 나는 지금도 ‘주력酒力은 필력筆力’이라는, 세상에 있지도 않은 말로 학생들을 꼬드겨 술잔을 권한다.(단, 마시기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권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하고는 상종할 일이 별로 생기지 않는다.)

둘째,

연애를 많이 하라.

천하의 바람둥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무릇 모든 연애는 나 아닌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연애시절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연애의 상대와 자신의 관계를 통해 수없이 많은 관계의 그물들이 복잡하게 뒤얽힌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훌륭한 연애의 방식을 찾기 위해 모든 관찰력과 상상력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연애는 시간과 공을 아주 집중적으로 들여야 하는 삶의 형식 중의 하나인 것이다. 연애감정도 없이 시를 쓰려고 대드는 일은 굳은 벽에 일없이 머리를 부딪치는 것과 같다. 담쟁이넝쿨을 생각해보라. 담쟁이넝쿨은 담을 어루만지며, 담에 매달리며, 담하고 연애하면서 담을 타고 오른다.

셋째,

시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많이 쓰기 전에, 많이 생각하기 전에, 제발 많이 읽어라. 시집을 백 권 읽은 사람, 열 권 읽은 사람,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 중에 시를 가장 잘 쓸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초보자가 쓴 시의 성패는 분명히 독서량에 비례한다. 여기에서 시를 많이 읽는다는 것은 쓰기의 준비 단계이며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시를 접하지 않고서는 좋은 시를 선별할 수 없으며, 좋은 시를 쓸 수도 없다. 나는 시창작 강의 첫 시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시집 목록을 프린트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모두 200권쯤 된다. 목록을 받아든 학생들의 입이 딱 벌어진다. ‘어느 세월에?’ 하는 표정들이다. 내가 강의하는 건물에는 국악과가 있어 가야금이나 거문고 따위를 들고 오르내리는 학생들이 자주 보인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시집이 악기다. 시집은 악기처럼 비싸지 않고, 무겁지 않고, 고장이 나지도 않는다. 시집을 읽기 위해서는 연주 연습을 하듯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 어디에서든 가방에서 잠깐 꺼내 읽을 수 있다. 고등학교 때는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쏙 드는 시를 만나면 노트에 적어두었다. 그렇게 필사한 시가 대학노트 세 권에 가득하였다. 지금도 문예지를 읽다가 좋은 시를 만나면 반드시 따로 옮겨 적어 둔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필사를 권한다. 아니, 거의 강요한다. 한 학기를 마칠 때쯤이면 수백 편의 시가 적힌 자기만의 시집이 오롯이 남으니,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다. 다양한 시를 읽는 것은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것과 같다. 나는 음식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내가 요리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거기에 들어간 재료와 음식의 빛깔과 요리방법에 대해 꼼꼼하게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래서 한 번 먹어본 특이한 음식은 집에서 혼자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훌륭한 관찰의 소재가 되고, 그 기억은 또한 멋진 시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본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줄 아는 법이다. 즉 맛있는 시를 많이 음미해본 사람이 맛있는 시를 쓸 수 있는 이치와 같다.

 

   2. 시마(詩魔)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

‘똥’이라는 말은 얼마나 향기로운가! ‘똥’이 삶의 실체적 진실이라면 ‘대변’은 가식의 언어일 뿐이다. 시는 ‘대변’을 ‘똥’이라고 말하는 양식이다. 그리하여 시는 ‘똥’이라는 말에 녹아 있는 부끄러움까지 독자에게 되돌려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워 슬그머니 미소를 띤다. 모름지기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은 ‘똥’에 유의해야 한다. 절대로 ‘똥’을 무시하거나 멀리해서는 안 되며, ‘똥’이라는 말만 듣고 코를 싸쥐어서도 안 된다. 똥을 눌 시간을 겸허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똥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며, 똥하고 친해져야 한다. 똥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다. (똥을 괄시했다가는 얼굴에 똥칠 당하기 쉽다.) 지리산 실상사 근처에서 한 보름 지낸 적이 있다. 시집 원고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번잡한 세상의 일들을 뒤로 밀쳐두고 싶은 속셈도 없지 않았다. 내가 묵은 곳은 산 중턱의 외딴집이었다. 그 집 뒤로는 인가가 한 채도 없었다. 지리산의 한 능선이 구불구불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방안의 가재도구라고는 빗자루와 쓰레받기, 휴지통 하나가 전부였다. 인터넷이나 전화도 없었다. 방 한 칸이 집 한 채인 집이었다. 다행히 전기가 들어와서 밤에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마당가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세수를 할 수 있었다. 그 외딴집은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집이었다. 밤늦게 글을 쓰다 보면 늦잠을 자게 마련이어서 아침밥은 걸렀고, 점심과 저녁은 실상사 공양간에서 얻어먹었다. 그렇게 하루 두 끼를 먹고 이튿날 눈을 뜨면 어김없이 뱃속에서 신호가 왔다. 화장실까지 한참을 걸어내려 가야 하는 게 귀찮아서 매일 뒷산에서 ‘큰일’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절밥을 먹었으니 땅에게 똥을 돌려주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삽 한 자루와 휴지만 달랑 들고 숲 속으로 가면 곳곳에 내 똥을 받아줄 자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산에서 똥을 누는 사람이 되었다. 아, 나는 그 아침의 오묘하고 향기로운 냄새를 잊지 못한다. 그것은 똥 혼자서만 풍기는 냄새가 아니었다. 흙과 똥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기막힌 화음이었다. 도시의 화장실은 똥을 감추고 그 냄새를 지워버리려고 애를 쓰지만, 흙은 숨기지 않고 아주 익숙하게 받아들일 줄 안다. 사람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양변기에 눈 죽은 똥은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흙속에 눈 똥은 쉽게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흙속에서 똥은 오롯이 살아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기를 꿈꾸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덕분에 시 한 편을 얻었다. 뒷산에 들어가 삽으로 구덩이를 팠다 한 뼘이다 쭈그리고 앉아 한 뼘 안에 똥을 누고 비밀의 문을 마개로 잠그듯 흙 한 삽을 덮었다 말 많이 하는 것보다 입 다물고 사는 게 좋겠다 그리하여 감쪽같이 똥은 사라졌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산을 내려왔다 ―똥은 무엇하고 지내나? 하루 내내 똥이 궁금해 생각을 한 뼘 늘였다가 줄였다가 나는 사라진 똥이 궁금해 생각의 구덩이를 한 뼘 팠다가 덮었다가 했다

―「사라진 똥」

전문1)

나는 도라지꽃 앞에서, 싸리꽃 앞에서, 칡꽃 앞에서, 애기원추리꽃 앞에서, 이름도 모를 버섯들 앞에서 매일 똥을 눴다. 그리고는 삽으로 꼭꼭 덮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절밥을 먹고 똥을 땅에게 돌려주었더니 땅은 또 많은 것을 내게 선물하였다. 매미소리, 새소리, 계곡의 물소리, 소나무를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아침마다 나를 응원하는 듯하였다. 실상사 약사전의 부처님께 나도 무엇인가를 바치고 싶었다. 그리하여 시 한 편이 더 씌어졌다. 싸리꽃을 애무하는 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 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 울음 서른 되

―「공양」

전문2)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와 향기들을 ‘일곱 근’ ‘육십 평’ ‘두 치 반’ ‘칠만 구천 발’ ‘서른 되’로 계량화한 것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었다. 2007년 7월부터 정부에서는 표준도량형 제도를 시행한다고 밝힌 바 있다. 도량형을 통일함으로써 여러 단위의 혼용에서 오는 국가적 손실을 없애고 그 편리성과 효용을 국민이 누리게 한다는 취지가 그것이다. 이른바 실용적인 필요성 때문에 법적 구속력이 있는 표준도량형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는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시는 실용과 경제의 반대편에 똬리를 틀고 있는 그 무엇이다. 때로는 어슬렁거림이고, 때로는 삐딱함이고, 때로는 게으름이고, 때로는 어영부영이고, 때로는 하릴없음인 것이다. 시는 실용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와는 다른 시적 가치를 요구한다. 그것은 세상의 미학적 가치를 탐구하는 일인데, 우리는 그것을 시작詩作이라고 부르거나 시적 순간을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살다 보면 시적인 순간은 쉽게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영감靈感이나 시상詩想이 떠오르는 시적 순간은 의외로 곳곳에 산재해 있다. 초보자는 시적 순간이 수시로 입질을 하는데도 그것을 낚아채는 때를 놓쳐버리기 일쑤다. “영감이 오는 순간에 당신은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번득이는 첫 생각과 만나는 순간 당신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큰 존재로 변화한다.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과 연결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첫 생각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그동안 당신이 겪어온 감정과 사건과 정보가 밑바탕이 되어 발산되는 것이기에 엄청난 에너지에 물들어 있다.”나탈리 골드버그의 말이다.

3)

그렇다. 시인이란, 우주가 불러주는 노래를 받아쓰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든 메모지와 펜을 챙기고 받아쓸 준비를 하라. 잠들기 5분전쯤 기발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아, 내일 아침에 꼭 그것을 써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잠들어버리지 말라. 영감은 받아 적어두지 않으면 아침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해서 놓친 시가 수십 편이나 된다. 아쉬워해도 소용없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아예 메모지와 펜을 머리맡에 두고 잔다. 화장실에도 놓아둔다. 속주머니에도 넣어둔다. 한 편의 시가 나오기 전까지 나도 내 안에서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 궁금해서 기다려진다. 시가 나오기를 기다릴 때 시가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이 녀석은 성질이 청개구리 같아서 꺼내려 하면 얼른 숨는다. 아무리 좋은 컨디션, 고요한 시간, 알맞은 분위기를 준비해놓고 유혹해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무관심한 척,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하면, 그때서야 저도 심심하고 궁금하니까 살살 고개를 쳐든다.(…) 그러나 시를 잡을 준비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그 녀석도 눈치가 빤해서 잡히려고 하지 않는다. 이 녀석은 내가 준비가 안 된 순간을 느닷없이 급습하여 난처한 상황에 빠져 쩔쩔매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4)

김기택이 시를 잡아채는 방식이다. 시가 오는 순간을 기다리며 조바심 내는 시인이 모습이 어린애 같다. 시와 시인과의 대결은 서로 잡고 잡히는 어린애들의 놀이와 다르지 않다. 옛 시인들은 시마詩魔가 있다고 믿었다.

5)

시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한다. 이 귀신이 몸에 붙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고, 몸과 마음이 온통 시에 쏠려 있게 된다. 시를 쓰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시를 한창 쓰고 있을 때 당신도 이 귀신을 만나야 한다. 이 귀신과 친해져서 이 귀신이 옮긴 병을 앓아야 한다. 당신도 시마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

 

3.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는 결별하라

만약에 당신이 ‘가을’을 소재로 한 편의 시를 쓴다고 치자. 당신의 머릿속에 당장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가을의 목록은 십중팔구 ‘낙엽 ․ 코스모스 ․ 귀뚜라미 ․ 단풍잎 ․ 하늘 ․ 황금들녘 ․ 허수아비 ․ 추석’과 같은 말들일 것이다. 이런 말들이 당신의 상상력을 만나기 위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할 것이다. 그러다가 낙엽은 ‘떨어진다’는 말로 연결되고, 코스모스는 ‘한들한들’이라는 의태어를 만나고, 귀뚜라미는 ‘귀뚤귀뚤’이라는 의성어와 결합하며, 단풍잎은 ‘빨갛게’ 물이 들 것이며, 하늘은 ‘푸른 물감을 뿌리다’는 문장과 조우하며, 황금들녘은 풍요의 이미지를 데리고 올 것이며, 허수아비는 반드시 ‘참새’를 불러들이고, 추석은 ‘보름달’로 귀결될 것이다. 이렇게 한심한 조합으로 시의 틀을 짜려고 한다면 그 순간, 그때부터 당신의 시는 망했다고 보면 된다.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다. 당신의 시는 상투성의 그물에 스스로 갇힌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상투성은 시의 가장 큰 적이다. 그것은 대상을 피상적으로 인식하면서 생기는 마음의 독버섯과 같다. 겉은 멀쩡한데 우리의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독을 품고 있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상투적이란, 마치 그것이 자연스러운 듯, 마치 어떤 기적으로 거듭 나타나는 단어가 여러 가지 이유로 각각의 경우마다 적당하다는 듯, 마치 모방하는 것은 더 이상 모방으로 감각될 수 없는 듯, 어떤 마력도 어떤 열광도 없이 반복되는 단어’라고 말했다.

6)

동어반복을 지적한 것이다.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도 그 반복의 지겨움을 깨우치지 못하고 그 반복이 진리라고 믿는 게 상투성의 원리다. ‘기계적인 우리들의 삶 속에 파묻혀 있는 세계를 관찰하고 느끼고 그것을 언어로 드러내는 일’을 오규원은 ‘미적 인식’이라는 말로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7)

아무리 아름다운 소재라고 하더라도 시인의 미적 인식에 의해 재발견되지 않으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가 없으며 죽은 인식의 되풀이에 불과하다. 죽은 인식은 죽은 언어를 불러온다. 시인의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는 죽은 언어를 구별하여 과감히 버리고 살아 있는 언어와 사투를 벌이는 일이다. 연탄 이야기를 잠시 하자. 언제부터인가 내 이름 앞에 슬그머니 ‘연탄시인’이라는 말이 붙어 다니는 것을 보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나무시인’이나 ‘풀잎시인’이 아니고 하고많은 소재 중에 왜 하필이면 연탄이란 말인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전문

8)

아마도 이 시를 비롯해서 연탄을 소재로 몇 편의 시를 쓴 탓일 게다. 애초에 나는 연탄을 소재로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희생을 쓰려고 했던 게 아니다. 나는 연탄을 내세워 ‘가을’에 대해 쓰고 싶었다. 아니, ‘가을’을 쓰려고(‘가을’을 내 방식으로 인식하려고) 연탄을 끌어들였다는 말이 맞겠다. 옛날에는 여름의 뜨거운 기운이 꺾일 때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연탄이었다. 연탄을 실은 트럭과 리어카가 거리와 골목을 누비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가을이었다. 그러니까 연탄은 내게 두 가지의 의미를 한꺼번에 선물했다. 하나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인식하는 소재로, 또 하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상징으로 나에게 온 것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과 희생의 이미지는 오히려 연탄보다 ‘촛불’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촛불이 연탄보다 더 시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상투성에 굴복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신석정을 비롯해 이미 많은 시인들이 촛불의 자기희생을 노래했다. 지금 와서 그것을 굳이 시라는 형식에 담아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 상투적인 동어반복만큼 비시적인 것도 없는 것이다.(2008년 여름, 한국의 서울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은 또 다른 의미 규정을 요한다. 그 수십만의 촛불은 단순히 어둠을 밝히는 관념으로서의 촛불이 아니라 시민들의 위대한 연대라는 문화사적인 의미를 내장한 촛불이었다. ‘골방/촛불’‘광장/횃불’이라는 고정관념을 ‘광장/촛불’로 전환시킴으로써 촛불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과 규모로 한국사회에 새로운 분노를 표시하였다. 촛불이 도심 한복판에서 저항의 들불이 된 것이다.) 초등학생들에게 동시를 가르치는 교실에서도 문제는 수없이 발견된다. 2학년 1학기 『쓰기』 교과서에는 말의 재미를 느끼게 하기 위해 반복되는 말이나 흉내 내는 말을 써보라고 하는 단원이 있다. 당신 같으면 다음 괄호 안에 어떤 말을 넣을 것인가? ‘토끼는 ( ) 뛰어간다.’ 물론 정답은 ‘깡충깡충’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 중에 과연 토끼가 깡충깡충 산을 뛰어오르는 모습을 본 아이가 몇이나 될까? 아이들은 대부분 동물원이나 토끼장에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토끼를 본 게 전부일 것이다. 이런 기계적인 동시교육은 ‘시냇물은 졸졸졸’ ‘새싹은 파릇파릇’ ‘흰 눈은 소복소복’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시라는, 매우 잘못된 생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표현의 경직성은 사고의 경직성으로 옮아간다. 아이들의 말랑말랑한 머리를 딱딱하게 만드는 이런 나쁜 동시교육을 이제는 한시바삐 집어치워야 한다. ‘미美는 언제나 엉뚱하다’고 한 보들레르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당신이 다다르고자 하는 미적 인식을 위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을 창작의 신조로 삼으라.

9)

 이문재는 문학청년 시절 ‘문학개론’ 첫 시간에 노교수가 ‘문학은 인생이다’라는 문장을 칠판에 쓰는 걸 보고 강의실을 뛰쳐나가고 싶었다고 한다.(「내가 만난 류시화」,『시와시학』, 2004년 봄호) 스무 살 봄날, 나에게 문학은 인생 그 이상이어야 했다. 문학은 인생의 멱살을 휘어잡거나, 인생과 무관한 강렬한 빛이거나 독약 같은 것이어야 했다. 나는 강의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류시화와 어울리며, 고전음악 감상실을 찾았고, 대학로에 죽쳤다. 캠퍼스와 강의는 고루하고 지루했다. 우리에게는 파격이 필요했다. 고정관념과 선입견, 관습과 제도를 뛰어넘는 파천황이 절실했다. 우리는 수업시간에 벌떡 일어나 노래를 불렀고, 본관 앞에서 막걸리에 도시락을 말아먹었다. 글씨를 왼손으로 썼고, 담뱃갑을 거꾸로 뜯었다. 이런 행위를 단순히 문학청년의 치기로 볼 수만은 없다. ‘시적인 것’을 찾으려는 탐색의 정신은 혼돈과 암흑을 깨뜨리는 파천황의 정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 당신이 늘 보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라. 소소한 것에서부터 삶의 기미를 포착하고 파악하는 습관을 길러라. 사물을 반듯하게 보지 말고 거꾸로 보라. 세상을 걸어 다니면서 보지 말고 때로는 물구나무를 서서 바라보라. 지금부터는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것들을 의심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던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고,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는 결별을 선언하라.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한 순간도 미적 인식에 다다를 수 없게 된다. 거창 학동 마을에는 바보 만복이가 사는데요 글쎄 그 동네 시내나 웅덩이에 사는 물고기들은 그 바보한테는 꼼짝도 못해서 그 사람이 물가에 가면 모두 그 앞으로 모여든대요 모여들어서 잡아도 가만 있고 또 잡아도 가만 있고 만복이 하는 대로 그냥 가만히 있다지 뭡니까. 올 가을에는 거기 가서 만복이하고 물가에서 하루종일 놀아볼까 합니다 놀다가 나는 그냥 물고기가 되구요! 정현종의 「바보 만복이」 전문이다.

10)

이 무슨 말인가? 바보가 물고기를 꼼짝 못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는 말은 만복이가 바보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남들이 그의 (어수룩한 외모나 모자라는 지능이나 우스운 이름을 보고) 바보라고 놀리고 업신여기지만 실제로 만복이는 물고기라는 자연과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다. 시인은 만복이하고 놀고 싶다는 말을 숨기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도 은근히 일상적 시각을 바꾸고 고정적 관념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놀다가 물고기가 되겠다고 마지막 행에서 (어처구니없게도) 말한다. 남들은 바보라고 하지만 진실은 바보가 아닌 만복이의 편에 서는 것, 이것이 시인의 길이다.(합리적 이성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그리하여 시인을 또 바보라고 하겠지)

 

4. 부처와 예수와 부모와 아내를 죽여라

   시라는 형식, 혹은 시집이라는 형식 속에 가족을 끌고 들어와 챙기고 쓰다듬는 행위는 아무래도 비시적이다. 그런 사랑은 시집 바깥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법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여라.”중국의 고승 임제臨濟의 화두다. 무슨 말인가? ‘나 아닌 다른 경계에 동요하지 말라’는 말이고, ‘일체를 부정하고 벗어나라’는 말이며, ‘그 어떤 권위나 관념들로부터도 벗어나라. 인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안에도 있지 말고 밖에도 있지 말고 중간에도 있지 말라’는 것이다.

11)

일체의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야 깨달음에 이르듯 시로 접어드는 길도 그러한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는 절대자와 부모,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바치는 양식이 절대 아니다. 시의 초보자일수록 ‘무엇을 위해서’ 쓰려고 한다. 또 ‘누구를 위해서’ 쓰려고 한다. 시가 천박해지는 순간이다. 그 무엇을 위해서도 쓰지 말고, 그 누구를 위해서도 쓰지 말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아내를 만나면 아내를 죽여라. 부처를 우러르면 불경을 읽으면서 절을 하면 될 것이요, 예수를 믿으면 교회를 다니면서 기도를 하면 된다. 부모를 공경하면 지극히 효도를 다 하면 될 것이요, 아내를 사랑하면 한 번 더 껴안아주면 그만이다. 시에다가는 단 한 줄도 절대자의 말씀을 받아 적지 마라. 제발 부모의 자애로움을 칭송하지 말 것이며, 금실 좋은 아내와의 관계를 떠벌리지 마라. 그래도 부처와 예수와 부모와 아내를 시에다 쓰고 싶어 못 견디겠으면 어떻게 하나? 부처의 말씀을 관념의 테두리 안에 가둬버리고 실천할 줄 모르는 자들에 대해 써라. 예수를 팔아 제 잇속을 챙기는 자들을 크게 꾸짖는 시를 써라. 부모의 비겁함과 치부와 죄를 찾아 써라. 아내의 쩨쩨함과 실수와 과욕에 대해 써라. 일찍이 김수영은 시인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이렇게 노래했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부분

12)

시인은 이렇듯 절정에서 조금쯤 옆으로 비껴서 있어야 하는 자이다. 종교가 진리의 절정에 도달한 정신의 영역이라면 문학은 진리의 위기를 포착하는 풍향계여야 한다. 종교와 문학이 손쉽게 화해하면 둘 다 망한다. 시는 종교를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서도 안 되며,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시의 마음은 종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함께 가되, 시의 몸은 종교가 가리키는 방향의 반대쪽을 향해 서 있어야 한다. 그 어깃장, 그 버티는 안간힘, 그 불화의 순간에 가까스로, 시는 태어난다.

 

5. 관념적인 한자어를 척결하라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전통 속에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우리는 한자 혹은 한자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시인들은 한자의 형상이 드러내고 있는 시각적 이미지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한자가 시인들을 자극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기호의 의미는 같지만 ‘산’이라고 쓸 때와 ‘山’이라고 쓸 때 그 함의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우스운 이야기 하나. 어릴 적에 나는 음식점 간판에 적힌 ‘산낙지’를 보고 한동안 산에 사는 낙지인 줄 알았다. 가재처럼 심산유곡의 돌덩이 밑 어디쯤 사는……) 그런데 뜻글자라고 해서 그 뜻과 형상이 다 미학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니다. 관념적인 한자어는 시에서 척결해야 할 대표적인 낡은 언어다. 시적 언어의 성취 목표를 한 50년 이전쯤에 두고 있는 사람일수록 관념적인 한자어를 쉽게 지워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유치환이 「깃발」에서 ‘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라고 노래한 것은 1930년대 말이었고, 박인환이 “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라며 절망스러워 한 것은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였다. 김현승이 「堅固한 고독」을 발표한 때는 60년대 중반이었다. 이 시인들이 ‘애수’와 ‘애증’과 ‘견고한 고독’을 노래할 즈음에 그 시어들은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그 시어들은 시간의 무덤에서 하얗게 풍화된 죽은 말들이다. 무엇보다 관념적인 한자어를 써야만 그럴 듯한 시가 된다는 착각이 문제다. 정진규는 시에서 ‘몸’이 빠진 관념은 ‘화자 우월성’의 화법과 사유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라고 꼭 짚어 말한 바 있다. 우리 시인들이 대상이나 상황을 높은 자리에 앉아 내려다봄으로써 그 안으로 스미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서둘러 앞서 가고자 지시의 화살표를 긋는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결국 추한 욕망이 되고 만다.”고 꼬집는다.

13)

당신은 관념적인 한자어가 시에 우아한 품위를 부여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품위는커녕 한자어 어휘 하나가 한 편의 시를 누르는 중압감은 개미의 허리에 돌멩이를 얹는 일과 같다. 신중하고 특별한 어떤 의도 없이 아래의 시어가 시에 들어가 박혀 있으면 그 시는 읽어 보나마나 낙제 수준이다. 갈등 갈망 갈증 감사 감정 개성 격정 결실 고독 고백 고별 고통 고해 공간 공허 관념 관망 광명 광휘 군림 굴욕 귀가 귀향 긍정 기도 기억 기원 긴장 낭만 내공 내면 도취 독백 독선 동심 명멸 모욕 문명 미명 반역 반추 배반 번뇌 본연 부재 부정 부활 분노 불면 비분 비원 삭막 산화 상실 상징 생명 소유 순정 시간 신뢰 심판 아집 아첨 암담 암흑 애련 애수 애정 애증 양식 여운 역류 연소 열애 열정 영겁 영광 영원 영혼 예감 예지 오만 오욕 오한 오해 욕망 용서 우애 운명 원망 원시 위선 위안 위협 의식 의지 이국 이념 이별 이역 인생 인식 인연 일상 임종 잉태 자비 자애 자유 자학 잔영 저주 전설 절망 절정 정신 정의 존재 존중 종교 증오 진실 질서 질식 질투 차별 참혹 처절 청춘 추억 축복 침묵 쾌락 탄생 태만 태초 퇴화 패망 편견 폐허 평화 품격 풍자 피폐 필연 해석 행복 향수 허락 허세 허위 혼백 혼령 현실 화려 화해 환송 황폐 회상 회억 회의 회한 후회 휴식 희망 언뜻 보면 2음절의 이런 말들은 매우 심오한 깊이를 함축하고 있는 언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어휘들은 구체적인 실감을 박제화하고 개념화함으로써 스스로 진부하게 되어버린 말들이다. 사전에는 단어로서 버젓이 실려 있고 일상생활에서도 가끔씩 사용되는 말이지만 시에서는 죽은 언어와 다름없다. 시는 이런 진부한 시어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다. 사유라는 것은 원래 그 속성상 관념적인 것이고 추상적인 법이다. 하지만 관념을 말하기 위해 관념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학대행위다. 관념어는 구체적인 실재를 개념화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시에만 관념어가 시를 좀먹고 있는 게 아니다. 예식장에도 있다. 흔해빠진 주례사가 그것이다. 행복과 공경과 우애와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간 주례사가 귀에 들리면 한시바삐 밥을 먹으러 가고 싶어진다. 진정한 사랑은 개념으로 말하는 순간 지겨워진다. 관념어는 진부할 뿐 아니라 삶을 왜곡시키고 과장할 수도 있다. 또한 삶의 알맹이를 찾도록 하는 게 아니라 삶의 껍데기를 어루만지게 한다. 당신의 습작노트를 수색해 관념어를 색출하라. 그것을 발견하는 즉시 체포하여 처단하라. 암세포 같은 관념어를 죽이지 않으면 시가 병들어 죽는다. 상상력을 옥죄고 언어의 잔칫상이어야 할 시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관념어를 척결하지 않고 시를 쓴다네, 하고 떠벌이지 마라. 관념어를 떠나보내고 나면 그 휑하니 빈자리가 몹시 쓸쓸하게 보일 것이다. 당신은 그 빈자리를 오래 응시하라. 당신의 상상력이 가동하기 시작할 것이고, 상상력은 이미지라는 처녀를 데리고 올 것이다. 말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그 처녀를 꽉 붙잡고 놓지 마라. 관념어를 떠나보낸 자리에 그 처녀를 정실부인으로 들어앉혀라. 그래도 관념어의 옛정이 그리워져 못 견디게 쓰고 싶거든 그 말을 처음 쓴지 30년 후쯤에나 써라.

 

6.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써라

   좋은 시란 어떤 시를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좋은 시란 이것이다, 라고 정의하는 순간, 모든 시는 그 낡은 기준에 갇혀버리는 나쁜 운명을 맞게 된다. 시가 늘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양식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좋은 시란 이것이다, 라고 감히 정리해본다면 어렴풋하게나마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새로운 언어로 표현된 시. 둘째, 새로운 인식을 도출하는 시. 셋째, 새로운 감동을 주는 시. 여기에다 시인의 시작 태도가 공자의 말씀대로 ‘사무사思無邪’ 바로 그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감동은 일차적으로 시인과 독자와의 교감, 즉 소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모든 시가 다 울림을 갖는 것은 아니다. 허망한 소통보다는 고독한 단절이 오히려 서로를 행복하게 할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시를 보는 미학적 관점과 언어에 대한 경험이 자연스럽게 일치할 때 시적 감동은 증폭될 것이다. 근육은 날자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絶海孤島, 내리꽂혔다 솟구친다 근육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이 쾌감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 무늬로 뒤덮인다 발 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 서녘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 동이일까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 ―박형준, 「춤」 전문

14)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을 따는 것으로 비행 연습을 한다’는 문장이 제목 밑에 붙어 있는 시다. 이 문장은 시의 본문으로 독자를 안내하는 구실을 한다. 그런데 본문에 쓰인 언어를 보면 ‘고독’ ‘전율’ ‘쾌감’과 같은 관념어들이 여과되지 않고 돌출해 있다. 그럼에도 관념어들은 그 빛을 잃지 않고 신기하게도 요소요소에 알맞게 자리 잡고 있다. 어린 송골매의 고독과 전율과 쾌감이 독자에게 전이되는 까닭이다. 그 전이는 벼랑과 허공이라는 절대적 공간의 설정, 상황의 긴장감, 언어의 절제미가 서로 어울리면서 이루어진다. 언어란 시인과 독자 사이에 놓인 가교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훼방꾼이기도 하다. 저 유서 깊은 ‘낯설게 하기’는 그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자 할 때 여전히 유효한 시적 방법이다. 독자를 편하게도 하고 불편하게도 하는 시, 이것인가 싶으면 저것인 시, 바른가 싶으면 이미 비뚤어져 있는 시…… 좋은 시를 쓰고 싶다면 당신은 표현의 리얼리티 속에서 감동의 요소를 찾으려고 끙끙대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일차적으로 당신은 가장 물기 많은 말, 가장 적합한 어휘를 행간에 배치하기 위해 헤매야 한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언어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만날 때까지 찾고, 지우고, 넣고, 비틀고, 쥐어짜고, 흔들기를 마다하지 마라. 적어도 당신 하나쯤은 감동시킬 때까지 언어하고 치고 박고 싸워라. 완벽한 세계관과 정돈된 문학적 관점이 훌륭한 시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하나씩 껍데기를 벗고 성장하는 존재이다. 황지우는 “나는 시를 쓸 때, 시를 추구하지 않고 ‘시적인 것’을 추구한다. 바꿔 말해서 비시非詩에 낮은 포복으로 접근한다. ‘시적인 것’은 ‘어느 때나, 어디에도’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때그때 시를 쓰고 읽는 사람들이 ‘시적인 것’의 자격을 부여하는 행위를 통해 ‘시적인 것’의 틀이 생기며 이 틀에 준해서 사람들은 시를 쓰고,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평가한다.”라고 했다.

15)

이 말은 이미 ‘시’로 규정된 모든 규격화된 정의에 대한 부정을 통해 자신과 시를 갱신해 나가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시라는 규범의 틀에 갇히는 순간, 시는 이미 시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시적인 것’은 딱히 정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시인에게 모험과 도전을 요구하는 지침으로 이해해야 한다. ‘시적인 것’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손에 잡는 순간 또 달아나버리는 유기체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을 일찍이 간파한 고은 시인은 ‘시는 심장의 뉴스’라는 멋들어진 화두를 토하기도 했다.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한겨레출판, 2009) 안도현(시인, 우석대학교 교수)

'그룹명 > 문학의 향기(공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치원 -기형도-  (0) 2010.06.30
폐차장 근처 - 박남희 -   (0) 2010.06.30
박경원의 시  (0) 2010.06.13
ㅇ 좋은 시를 쓰려면  (0) 2007.05.23
유종호문학평론가, 시인  (0) 2007.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