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문학의 향기(공부방)

박경원의 시

언어의 조각사 2010. 6. 13. 21:51

 

나비와 잠

                                      박경원



정육점 안으로 나비가 날아든다

날개 가득 노란 잠을 묻히고 냉장고 밖 붉은 살덩이 위

전자 저울대 위, 봄의 무료함이 닿는 곳마다

물결같은 너울 비행을 한다

앉는다 서늘하게 언 삼겹살을 붉게 핀 꽃밭으로 착각하며

그 착각을 꽉 딛고서 감촉과 감촉을 살폿 접는다

의자 위 날짜 지난 신문은 한, 십 분 쯤 곤한 잠에 취해있다

사내의 코고는 소리가 다급해 질 때마다

살갑게 묻어 있던 활자들 부르르 흔들린다

마치 제 똥에 추방당하는 파리의 익살스런 몸짓처럼..

채식주의자처럼 가볍게 뜬 나비가 다시금 봄의 꽃밭을 난다

잘게 부스러지는 냉동실 소음을 가로질러

활자들의 고단한 언덕을 너울너울 가로질러

저울대 위에 사뿐 오른다

전자 계시판에 기록된 나비의 값이 순간, 오 원을 가리켰고

입 안에서는 잠의 가루들이 풀썩 날렸다


수집

                                          박경원


허리보다 낮게 내려온 한 노파가 나무 밑을 뒤적거린다

부패의 용량을 초과한 비닐 자루 사이

굳은살 박힌 종이  박스를 뜯어내며

뼈만 앙상한 손수레를 거리 끝으로 옮겨간다

등엔 재활용될 수 없는 살들의 쓰레기가 거듭거듭 쌓이고

가슴이 머물던 자리, 흔적조차 지워진 세월의 빝바닥을

두리번 살피면서도 또 다른 나무 밑으로 삶을 이동시킨다

플라타너스와 노파

둘 중 어느쪽이 흘렀는지

자리를 이동할 때마다 독한 하혈이 묻어난다

꼭 쥔 모서리를 내주며 산부인과의 분리되지 않은 일상이

아직은 속단할 수 없는 생살 그대로의 호흡이 편집된다

뒤돌아보면 몸을 푼 나무들이 종이를 낙태하고서

다시금 수런거리기 시작하고

더는 낮아질 수 없는 삶의 밑바닥 뿌리 근처

이미 굽은 허리를 애써 끌어내리며 뻣뻣한 주름이

부스럭, 지나친다        -신춘문예 당선작-



박경원 시인 프로필


1963년 안성 서운 출생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해묵음에 대하여" 당선

2001년 오늘의 작가상- 가작 수상

2001년 시집 <시멘트 정원> 민음사

2007년 시집 <나비와 잠> 키와 채





이월 가는 길 

                                           박경원


길의 끝엔 자그마한 면소재지가 있을 것이다

산 저쪽 말들의 권태의 성을 쌓는 오후와

햇살을 켜 놓고서 외출한 집들의 풍습이 있을 것이다

한 남자가 삶을 등지고 거실 벽 사진 속으로 들어간지도

십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짐작들이란 매번 헛수고로 그칠 때도 많다

말들은 여전히 벌레처럼 몸을 갉아먹고 있거나

성냥불을 켠 채 사진 속 안색을 들여다 볼지도 모른다

길의 끝 그 면소재지엔 좁은 골목들이

노파의 입에서 중얼중얼 새어나오고 있을 것이다

고추들은 더디 마르고

매운 태양만이 저녁의 지팡이를 짚고 있을 것이다

죽음들은 대부분 서쪽 산에 버려지며

바람 조용한 날엔 좁은 산길도 피었다 지는 곳, 그길 이쪽엔

손톱을 깎고 찾지 못한 각질 같은

이월 가는 길이 한 톨 떨어져 있곤 했다



 ***


나는 이 詩[ 이월 가는 길]을 읽으며, 문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진정하게 살아 숨쉬는 문학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들 삶의 흔적을 거울처럼 반영하며 언어로 빚어낸 예술이다

언젠가 이월‘을 넘어 본 경험이 내게도 있다

그 작은 면소재지의 정서를 이토록 꼼꼼히 놓치지 않은 시인도 드물리라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이월’이 다시 가고 싶어 진다

이월‘은 분명, 처음보다 더 나를 들뜨게 하거나, ’각질 같은 이월 한톨’에 걸려

어쩌면 그 작은 면소재지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고 싶을지도 모르리라

- 시인 이명희 -



안,

                                 박경원


어쩌다 옷을 입거나 벗다가 어두운 내부를 본다

빨간 옷엔 햇살 속 태양이

푸른 옷엔 몸속 가득 풀이 들어찬 듯한 좁고 어두운 내부

어렵게 열린 빗장뼈 아래에서 발가락을 핥고 있는

태아기의 부드러운 내가 들비친다

호흡을 끌어안다가 당한 갑작스런 흥분과 좌절

다시금 엉거주춤 들이마시는 호흡의 객관성과

때와 장소에 맞춰 혈액의 출입을 조절해 주는 감정의

때묻은 문지방까지 훤히 드러난다

부랴부랴 벗어놓고서 모습을 숨긴 이별의 언어들

가지런히 돌아와 인생과 관련된 피의 목록을 뒤적이는

침묵의 혈당량도 옷을 입거나 벗다가 샅샅이 발견된다

도대체 이 많은 내부들이 어떻게 보존될 수 있었을까

비좁고 부자연스럽고

숨이 어깨까지 차올라서야 고개를 드는 적나라한 내부

후줄근 구겨진 감정들을 세탁기에 넣고 나오려다가

움찔 붙들린다. 한 스푼쯤 정전기 제거제를 골고루

그것들 위에 뿌린다


문턱

                                 박경원

꽃들이, 잠수할 수 있는 깊이로 푸른 물결을 밀면서온다

살갖 드러난 흙을 가볍게 마취시키며 언덕 위, 풀밭위에

뽀얀 공복을 몰아다 놓는다

푸른 저쪽과 호흡 이쪽은 서로 낮면이 많다

생선 가시 같은 저쪽과 비릿한 이쪽은 서로 찔린 적이 많은 것 같다

꽁치처럼, 정어리처럼, 고등어처럼 푸른 무게의 두릅에 꿰여

장에서 돌아오는 저물녘 시장기 같다

그 위를 푸른 비늘만 밟으며 내가 나의 호흡을 산책한다

아무도 없던 풀밭 위, 왜 이리도 많은 내가 퍼덕일까

가슴 가랑이를 올려 푸른 바람의 문턱을 아무런 상처도 없이

넘어간다





음지의 날들

                                    박경원


나무 밑, 버섯처럼 음습한 그늘 속에서 노인들이 살고 있다

몸의 일부로는 끊임없이 어두운 양분을 빨아들이는지

가부좌에 결박된 채 하루 반나절을 곰곰히 삭힌다

햇살 저쪽 찌는 듯한 젊음들을 넘겨보며

알 듯 모를 듯한 체념을 입 속 깊이 솎아낸다

한때 자신들 삶을 뒤흔들었던 경전도 시들해진 지 오래다

무시로 잠입하여 길흉을 예고해 주던 몇 가닥 손금들도

말라붙은 지 이미 오래다

가끔씩 넣어지는 요구르트처럼

살과 살 사이가 쪼로록 비워지는 허망한 갈증을 느끼며

젊은 한 시절이 머무는 뜨거운 건물 저쪽에 뿌리 없는 관심을 던질 뿐

비가 내리고

더러는 생사의 소식이 가까운 맨홀을 통해 빠르게 사라지는 동안에도

그들은 하루에 한번씨감 젖다가, 마른다

몇 줌 습도, 주름살 속 망각의 희미한 양분이라도 남겨진 한

썩은 가부좌에 결박되어 죽음의 층을 버섯처럼 쌓아올리는

나무 밑 한때

한 노인이 낡은 인대를 꺼내어 무픞과 무릎을 맞바꾸고 있다

 

-시집 [시멘트 정원]에서




산과 역설

                                           박경원


그와 나는 저수지 한 켠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건너편 산을 넘어 온 바람에 기대어 서서 과거를 풀었다

대학시절의 그와 중학시절의 나를

큰 나무 둥치에 흘리며 누구의 사연이 더 긴지

묵묵히 알아보곤 쓸쓸히 돌아와 앉았다

새우깡을 훔치던 솔개미들이 술잔 속으로 익사하고

몇몇은 파삭 숨기도 했다

인력 때문일까 그들에게 이끌리는 자질구레한 걱정을

내심 곱씹지만 우리, 개미를 먹은 건 아니다

그러나 산을 넘은 바람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우리가 산이 아니고서야 그 바람 어떻게 깃들었겠는가

그가 먼저 산이 되었고 나는 한참 뒤에나 졸 수 있었다

***


이럴수가,

화자는 뭇 사내들처럼 어느 오래 된 지인과 저수지가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가 큰 나무 둥치 언저리로 가서 근심도 풀곤 했던 모양인데,

두 사내의 말없이 이어지는 행동들이 재미있게 그려진다

넉살스럽게 개미를 등장시키며 그 곁에서 그러나 먼저 너털웃음을 터뜨리지도

살가운 지인을 먼저 보내지도 못한다

진정으로 할말은 가슴에 남기는 법이라 했던가,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무언의 역설을 다시금 떠올린다

‘그가 먼저 산이 되었고 나는 한참 뒤에나 졸 수 있었다’고 저만치 하나의 추억이 되어버린 어느 날의 서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뒤춤에서 밀어 내는 것이다

나는 드물지만 이러한 진득한 작품들을 만날 때면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다

“나도 문득, 詩가 마렵다, 마려워 못 참겠다.”

-시인 이명희-


 

 

서평

아이러니의 독법,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 박경원, 『나비와 잠』, 키와 채, 2007

김 혁

                                                                                                  1. 은자는 꿈을 꾸지 않는다

                                                                                                  2. 아이러니의 독법을 찾아서

                                                                                                  3. 그대의 스티그마에게

 

 

1. 은자는 꿈을 꾸지 않는다

  

 시가 우리 삶에 의미를 드리우는 지점은, 그것이 이미 확고하게 고정된 삶의 방향을 뒤집어 놓으려는 혁명적 기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혁명이 꼭 필요한 것이냐고 되묻는다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시가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여도 그것을 읽는 모든 이에게 그의 삶 전체를 또 다른 정향(定向)으로 이끌도록 강요할 수는 없을 터이다.

  이것은 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말로 태어난 모든 것들의 타고난 숙명이다. 박경원은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는 듯하다.

 

 

가끔은 책을 꺼내어도 좋다

은밀하게 접힌 졸음들을 펼쳐 생각들을 따라가도 좋다

뒤로 젖혀진 고개를 바로잡으며

다른 페이지로 넘겨진 저녁 바람을

덜 깬 눈으로 건져 올려도 좋을 어스름 속

길게 지나치는 공상의 그림자에 밑줄을 긋다가

저녁 구름을 향해 지식을 통째로 던져버리고 싶은

무릎과 무릎 사이의 충동, 그 책 제 무게로 돌아오는 건

아주 잠깐이지만

옛사랑 비를 끌고 오는 건 아주 순간이지만

더는 읽혀지지 않는 무릎과 무릎 사이 밤의 무게

지식들이여 그러면 알겠는가

접혀있던 관절을 세워 꿈과 망각이 흐르는 침대로 간다

 

                                                           (「무릎 과 무릎 사이」에서)   

  

 거의 천년 전 “책읽기를 좋아하였지만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는 도연명과 같은 은자에게 책에 담긴 지식은 꼭 그런 것이었다. (도연명,「오류선생전(梧柳先生傳)」) “가끔은 … 꺼내어도 좋”고, “은밀하게 접힌 졸음들을 펼쳐 생각들을 따라가도 좋”을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데 지식은 은자의 밀실 밖에 서서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 손기척은 잠시 견디기만 하면 그저 스쳐갈 바람이 아니다. 이 같은 그칠 줄 모르는 유혹은 은자에게도 언제나 맥박을 뛰게 하는 충동으로 존재한다. 이 손기척에는 저자 거리로의 유혹이 도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자에게 이 욕망의 두근거림을 일으키게 하였던 것들은 해와 불의 중심에서 너울 비추고 있는 그림자일 뿐이다.(『장자(莊子)』,「․잡편(雜篇)․우언(寓言)」) 그것은 영원성을 가장하고 있는 위조의 세계이다. 그 세계에서는 늘 충동이 거부되며 삶의 조각난 에피소드는 값없는 것으로 경멸된다. 그곳에서 어느 누구의 캐릭터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부조만이 존재한다. “소년”이 있고, “노인”이 있고, “사내”가 있고, “여인”이 있고, “어머니”가 있을 뿐이다.(『논어』, “임금은 임금 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답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그런 세계에서 시인이 은유를 선호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미 성립된 모든 언어들은 언어의 문법과 함께 사회의 문법을 따르는 법이다. 그래서 그 문법에 도사려 있는 도상성만으로 그가 이르고자 하는 진정한 충동까지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도덕경』“道可道 非常道”) 시인은 이 세계로부터 주술 걸린 언어를, 그래서 다시 주술 걸린 그 언어로 구성된 이 세계로부터 자신의 의미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이러한 것을 자각한다는 것만으로 , 진정한 충동과는 거리가 먼 욕망의 그림자에서 자신을 건져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그는 “접혀 있던 관절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완고하게 고정된 정향성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그렇다. 그렇게 여기는 것 같다. 이것은 자신의 진정한 충동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충동은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언어는 “매년 보습에 채여 출토”된다는 “활자의 파편”이며 “도시에서 가져온 지식”에 불과하다.(「밑줄친 흙」)  

  그래서 그는 무료한 부조가 아로 새겨진 한 낮의 노동보다는 차라리 “밤의 무게”가 내려 앉아 있는 “꿈과 망각이 흐르는 침대”로 향한다. 이것은 새벽마다 다가오는 소년의 몽정과 같다. 발기하는 혈류의 충동은 늘 그렇듯이 은자에게 위조된 가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원심력으로 존재한다.

   가치 세계의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난 그곳은 “요즘도” 가끔 그가 찾는다는 “그 지방,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작은 다리”이다.(「이야기1」) 혹은 “폐촌 근처에서” “바람의 이정표”가 되어버린 “뭍 안의 섬”이거나(「섬2」), “어깨와 팔꿈치 사이 유난히 선명한 문신 자국의 사내가 더디 끓는 뚜껑을 덮으면서” 기다리고 있던 고압선이 지나가는 어느 곳이기도 하다(「고압선」). 그곳은 늘 가치의 원광에 억눌려 있는 일상의 의도되지 않은 것들이 남겨진 곳이다. 그 우연의 자리에는 침묵이 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이 있다.(프루스트,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 길 없는 길은 그의 우언 속에서만 설핏 그림자로만 비칠 뿐이다. 우언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이 길을 찾아 나서려는 이 시인의 손에 들려진 무딘 불빛의 손전등이다. 이 시인은 이 우언의 의미를 유감없이 보여주고자 하였다. 박경원은 저 유명한 장자의 우화로부터 나비 하나를 꺼내서 “봄의 무료함”이 가득한 “정육점”으로 들여보낸다. 

 

 

정육점 안으로 나비가 날아든다

날개 가득 노란 잠을 묻히고 냉장고 밖 붉은 살덩이 위

전자 저울대 위, 봄의 무료함이 닿는 곳마다

물결같은 너울 비행을 한다

앉는다 서늘하게 언 삼겹살을 붉게 핀 꽃밭으로 착각하며

그 착각을 꽉 딛고서 감촉과 감촉을 살풋 접는다

의자 위 날짜 지난 신문은 한, 십 분 쯤 곤한 잠에 취해 있다

사내의 코고는 소리가 다급해 질 때마다

살갑게 묻어 있던 활자들 부르르 흔들린다

……(하략)……

 

                                                             (「나비와 잠」에서)

  

 우리가 세상을 애써 꿈꾸려 하는 그 지점은 욕망이 의미를 배태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 지점에서 은자는 역설의 교란을 들이댄다. 바깥의 의미는 안쪽의 욕망을 낳고, 다시 욕망은 우리를 꿈꾸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꿈꾸고자 하는 것에 의해 꿈꾸어진 존재에 불과하다.(『장자(莊子)․내편(內篇)』, 「제물론(齊物論)」) 

  그래서 박경원의 시에서 꿈을 직접 지시하는 법은 드물다. 나비가 있고 잠이 있고 활자가 있고 코를 고는 사내가 있을지언정, 나비와 꿈 사이에 꼭 꿈이 끼어있을 것만 같은 그 순간에도, 그는 꿈의 존재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그곳에서 꿈은 음각의 부조로 남아있을 뿐이다.

  꿈을 해체하고 있는 폐허 위에 남아 있던 공포는 우리 시대의 숙명이었다. 무의미가 가득 찬 “정육점”의 그곳은 “13인의 아해가” “질주”하던 바로 그 “도로”이다.(이상, 「오감도(烏瞰圖)」) 혹은 “꽃나무 하나”가 “한복판에” 서 있는 “벌판”일 수도 있다. 그 들판에 서 하는 모든 것들은 꽃나무처럼 무의미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림자가 지어내는 흉내 이상은 아니다.(이상,「꽃나무」)

  그렇다고 그 공포로부터 무조건 회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회피하고자 하는 그 반대편에 또 다른 의미의 과잉이 함정으로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내의 코고는 소리”가 가득 찬 정육점 안의 그 무의미한 공기로부터 성급하게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에서 무의미를 인내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곳에서 그는 꿈으로 향하고자 하는 타성화된 관습을 애써 배제하고 있다. 그것을 견뎌내는 힘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열매들이 익기를 기다리는 고된 수련이다. 그런 점에서 무의미한 현실에 애써 꿈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의미의 허상 같은 것은 지어내지 않겠다는 것은 이 시인이 무의미하게 비치는 세상에서 은자로서 살아가는, 그래서 자신의 독법을 유지하는 전략의 일부이다.

  그가 정작 우려하는 것은 꿈 그 자체가 아니다. 꿈으로 쉽게 기울어지고자 하는, 그 중심에 경도되기 쉬운 것은 우리의 익숙한 타성이다. 우리 삶에는 중심으로 향하고자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힘은 언제나 강고하여 우리 머리 속에 오래 전에 새겨졌던 표상이다. 우리에게 게으름의 징표처럼 남겨진 이 중심의 표상을 따라 우리는 자기 자신을 늘 그런 쪽으로 몰아가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매운 연기 속에서 희부연 비명을 지르고” 있는 불판 위의 삼겹살은 “말랑한 위선과 크고 작은 기만들이 비만의 관습으로 거듭 쌓”인 “짧은 삶과 긴 게으름”의 결과였다.(「삼겹살」)

  이런 게으름의 결과 나비가 사뿐 앉아야 할 곳은 반드시 꽃이어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이 나비는 “정육점 안으로” 들어와서 “붉게 핀” “삼겹살” 위에 “그 착각을 꼭 딛고서 감촉과 감촉을 살풋 접”는다. 이 시인은 그런 나비가 발을 디딘 곳이 “착각”이라고 한다. 여기서 착각이라고 시인이 고백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곳은 나비의 섬세한 다리와 화사한 날개와 육식 동물의 정련된 살코기가 부드럽게 조우하고 있는 곳이다. 이 둘 사이에서 격렬하게 부딪치는 감각의 파열음은 우리의 가청 영역을 훨씬 벗어나 있다. 시인에게 꿈은 가청 영역에서 숨을 곳을 찾고자 하는 느슨한 희망에 불과하다. 그런 꿈은 오히려 문자로 빚어진 위선으로 등장하며 그것이 오히려 사람들의 생명을 시들게 하는 원광(原光)임을 직시하고 있다. 그래서 박경원은 또 다른 시에서 그런 꿈이란 것이 애초에 “중심을 향한 공상”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산을 애기하는 사이

거리의 발길들은 평면의 땅을 기어오르고

내가 미처 설정하지 못한 곳에다

중심의 약속을 한 듯

잠시 마주 서서 대화를 물물교환하곤

우리의 얘기가 산을 내려오는 그 짧은 사이

거리의 발길들은 평면의 땅에서 멀어져

아득한 가장자리로 흩어지고 있었다

개미같아라

이 모든 게 우리의 산 이야기 아래에서

모였다 사라진 흔적이라니, 난 조용히

전설을 들어 거리의 동정을 한 모금 마신다

 

                                                     (「중심을 향한 공상」)

    

  중심에서 내려다 본 모든 것들은 “아득한 가장자리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 지점에서 내려다 본 그것들은 모두 “모였다 사라진” “개미 같다.” 이와 같은 초월의 지점에서 내려다 본 자조의 흔적들,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반추하는 강한 되새김질은 강철의 절단기처럼 단호하다.

  그에 의해 이 같이 냉철하게 되씹혀진 여물들은 “따듯한 그녀”(「따듯한 국」)에게서, “사수자리가 잘 전망될 9월 입구에”서(「사수자리1」), “산 저쪽 말들이 권태의 성을 쌓는 오후와 햇살을 켜놓고서 외출한 집들의 풍습”(「이월 가는 길」)에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장소”(「식물의 장례3」)에 남겨져 있다. 잊혀 지기 쉬운 이 모든 것들을 간신히 상기해 냄으로써, 우리가 싫어도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는 탄식하여 마지않는다. 

 

 

언 계절에 이르러 나는 본다

키울 것 다 키웠는데 고기들 없고

피울 것 다 피웠는데 연꽃은 없어

진흙 그리움으로 곱쌓인

내 뱃속은 아는가

………중략………

아, 사랑이여 부주의하게 떨궈진 너

한낱 새우깡 부스러기 같아라

아니 정녕 너야말로 기다림을 파삭파삭

짓이기면서

나의 촉촉한 입 언저리를 후질러 놓던

 

                                            (「겨울 못」)

  

그에게 남은 길은 하나였다. 삶에서 부질없는 꿈의 흔적을 말끔히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종종 그 격언을 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망각조차도 그의 미덕일 수 있다. 그곳은 그가 초인이 아닌 시인으로 우리 곁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꿈은 위안을 피할 수 없는 한, 인간에게는 숙명일 수 있다. 우리가 경험으로 늘 알고 있듯이 그 유혹은 결국 “새우깡 부수러기”의 같이 “기다림을 파삭파삭 짓이기면서 나의 촉촉한 입 언저리를 후질러 놓”고 만다. 우리에게 주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꿈으로 상상된 현실이다. 그래서 그것은 고통을 되새기게 하는 안간힘을 윤회의 바퀴로 굴린다.

  그래서 이 시인은 꿈을 꾸지 않으려 한다. 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인의 기도가 우리 생각의 일상적인 습관처럼 막연한 초월성이나 또 그를 통한 상대주의나 회의주의로 곧장 돌아가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유혹이 다가올수록 냉철한 눈을 거듭 모로 뜨고 그 현장을 예의 주시하고자 한다. 조악한 위조의 흔적에서 결코 눈을 떼지 않으려 한다.

 

 

2. 아이러니의 독법을 찾아서

  

 박경원은 그것이 꿈이라면 무조건 삶에 약이 될 것이라는 우리 시대의 통념과는 달리, 어설픈 꿈이야말로 우리 삶에 얼마나 큰 독이 되는지를 직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독이 우리 삶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약이 독이 되고 독이 약이 되는 이 세계의 아이러니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우리 삶의 현실적 숙명을 말해주는 핵심적 약호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다음 시는 너무도 쓰디 쓴 뒷맛을 남긴다.

 

 

나무를 타고 기어오른 햇살이

검푸른 잎을 딛고서 좁은 창 안으로 반짝임을 건넨다

메마른 기포와 어머니의 과거가

일대일로 빠져나가는 링거 속에다 똑똑똑, 끊이지 않는 응결점을 모아놓는다

잠에 들어야 더욱 싱싱해지는 어머니

어머니 빠져나가고 어머니 지워지신다

어머니 하얘지시고 어머니 비워지신다

회복을 빨아들이고 어머니 독해지신다

약물에 독해지다가 어머니 돌아눕는다

해독되지 못한 호흡에 떠오르다가 어머니 같은 어머니

악몽같은 어머니 속에 부스스 빠지신다

창 밖 라일락은 쓰다

넘어온 약물을 넘기는 어머니의 타액도 쓰다

링거에 매달린 모든 기포들도

오래도록 어머니를 매달고 있을 순 없다

오래도록 잠겨 있을 수 없는 삶, 푸르름을 틈 타

푸르름을 갉아먹는 창 밖 햇살처럼

회복을 밀어넣으며 삶을 덜어내고 있는

저 무수한 방울들

 

                                               (「회복실」)

  

 창 밖 햇살이 푸르름을 만들어 내고 있는 우리 통념의 다른 편에서 그것은 생명을 갉아 먹고 있다. “어머니의 과거”가 “메마른 기포” 방울과 조응하고 있는 그 지점에서 “회복을 밀어 넣으며 삶을 덜어내고 있는” 링거의 “저 무수한 방울들”이 “창 밖 라일락”만큼이나 “어머니의 타액”을 쓰게 하고 있다. 독이 약이 되는 전화, 동시에 약이 독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이 세계를 향한 아이러니의 독법은 단지 한 발 떨어져 세상을 관조하는 평정의 냉소 섞인 발화로서 행한 것은 아니다. 시인은 이 아이러니의 현실태를 이 회복실의 어머니에게서 보고 있다.

  어머니의 생명은 링거로부터 흘러나오는 “무수한 방울들”과 연결되어 있다. “어머니 빠져나가고 어머니 지워지신다 / 어머니 하얘지시고 어머니 비워지신다 / 회복을 빨아들이고 어머니 독해지신다”. 어머니의 푸른 생명과 링거의 독한 방울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아이러니가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시인은 이 관계가 “창 밖 햇살”이 “푸르름을 틈 타 푸르름을 갉아먹”고 있다는 준엄한 법칙에 눈을 돌린다. 이제 생명과 물질, 삶과 죽음은 구별되지만 서로 다른 방에 놓여있는 남남이 아니다.

  이 역설의 끝은 어디인가. 꿈을 꾸지 않으려는 시도가 곧 중심을 찾지 않으려는 곳에 있다면 그 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거기에서 그는 묘한 대안을 내어놓는다. 아이러니를 관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자신이 아이러니 속에 들어감으로써 그는 그것을 완성하려 한다.

  박경원은 현실에 아이러니를 부여해 놓은 채 그저 한 발짝 물러서는 초월자의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다. 그의 현실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수천 년 동안 현자들이 읇어 왔던 저 주문 같은 격언들이 모두 현실에 대한 투철한 의식의 소산임을 알게 된다.

  만물은 하나의 몸이다. 인간이란 이 세계에서 지나치게 강조점을 찍을 만한 것이 못된다. 과장되게 생명을 강조하는 독법조차 어색하다. 나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생명과 무생명, 주체와 도구, 인간과 물질을 넘어서 있다. 우리는 생물이면서 무생물이다. 생명이면서 무생명이다. 주체이면서 도구이다. 인간이면서 물질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우리에게 걸려 있는 의식의 주술을 풀기에 좋다.

 

 

그와 나는 저수지 한 켠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건너편 산을 넘어 온 바람에 기대어 서서 과거를 풀었다

……(중략)…………

그러나 산을 넘은 바람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우리가 산이 아니고서야 그 바람 어떻게 깃들었겠는가

그가 먼저 산이 되었고 나는 한참 뒤에야 졸 수 있었다

 

                                                  (「산과 역설」)

  

 산의 기운이 저수지로 건너왔다. 산의 기운이 바람이 되는 그 사이, 저수지에 있던 우리는 산이 된다. 이 환치의 어법은 분명 자신이 꿈의 일부가 되려는 기도이다. 그것은 자신이 나비의 꿈 속에 있다는 굳은 확신이다. 아니 그럼으로써 자신이 나비가 된다. 시인은 이 역설의 힘으로 삶을 덜어내고 있는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 같이 일체가 되는 방법은 사실상 모종의 새로운 기술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또 다른 확인에 불과하다. 우리는 행위자로서 모든 것과 얽혀 있다.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하고 있는 우리는 그 대화에서 핸드폰이라는 행위자와 분리될 수 없다. 핸드폰은 우리의 의사를 새로운 형식으로 번역해 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번역의 마법은 우리가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과는 또 다른 형식으로 존재하게 한다. 우리는 이 얼개 속에 존재할 뿐이다.

  

 

노인은 새를 키워 하늘을 얻었다

세상의 낮은 둥지와 메마른 벼랑을 얻었다

타원의 반짝이는 비상과 어깨 끝에서 굳은 푸른 무게의 잠을얻었다

연약한 새들의 몇 알 목숨을 훔치는 사이 하늘이 시들었다

길들의 맨 끄트머리가 조그맣게 말아 올려지는 듯한

슬픈 저녁들도 모았다

벌판 끝 도시에서 일어나는 금속성 사랑도 물끄러미 되씹었

그가 다시 늙은 새를 날리려 한다

낡은 주름 속에 숨어 있던 수성을 꺼내어 하늘 저쪽을 가리켰고

하나의 작은 순간

손가락 끝에 잔뜩 도사린 세상이 허공 속으로 역류하기 시작한다

무엇인가 무엇인가 노인의 굽은 손가락이 가파라지기 시작한다

 

(「몸 안의 끝」)

                 

  이 시인이 행위자로서 아이러니의 독법을 걸고자 하는 것은 새를 키워 하늘을 얻고자 하는 어느 노인을 닮아있다. 새를 하늘에 풀어놓았을 때 우리의 정신은 비상을 겪는다. 이 비상을 새를 떠나서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 이것이 그가 이해하는 만물이 하나의 몸이라는 현실일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몸이라는 것은 하나의 신앙이 아니다. 단순한 환영을 쫓는 心術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중요한 방식이다. 이 방식을 이해하는 길은 아이러니의 독법이 아니고서는 안된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에게는 온기를 느끼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한낱 물건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불일치이다. 이것을 이겨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다른 사람이 물건의 범주를 벗어나 나와 같이 느끼고 있다고 가정하든지, 아니면 자신을 또 다른 물건으로 이해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전자는 해석학적 동감의 원리를 탐색하는 쪽으로 귀결되어 왔다.

  그런데 이 시인이 택하는 방법은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다. 물건의 질서 속에 자신을 안치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물의 냉정함으로 자신을 고백하는 길 뿐이다. 아이러니의 독법이 갖는 특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이 같은 아이러니의 독법을 통해서 근대 문명이 우리에게 걸어 놓은 교묘한 자의식의 주술을 풀어 놓으려 한다. 근대적 자의식이란 몸을 신체의 안쪽으로 한정시키려는 알량한 기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 없는 진공 상태에서야말로 자신이 직접 꿈의 일부로 등장할 수 있다. 그가 이 독법을 준비하고 있는 까닭은 이 독법을 통해 세상을 읽으려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자신이 통합되는 꿈 속에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존재케 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3. 그대의 스티그마에게

  

 박경원이 추구하는 아이러니의 독법은 사람들을 냉정한 질서의 조망 속으로 들어오게 한다. 사람들이 그 질서 안에 들어서면, 그들은 결코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때문에 시인

의 눈에 이 사람들은 모두 식물로 살았다고 비친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식물로 살았다

푸른 캡슐 속에서 저장된 기억을 소비하며 존재의 안쪽만 지켰다

자신이 누구냐고, 기억하냐고

다가온 움직임들 생각의 바깥을 배회하곤 쓸쓸한 무게로 사라졌다

몸 속 날짜들이 낮게 수런거린다

가끔씩은 육중한 움직임에 실린듯

검붉은 식욕을 이끌고서 야광같은 공포가 지나쳤다

소가 접근한 듯한

그 억센 저승의 힘으로 부처 몸을 지켜내며 기억의 체적을 푸르게 움추려 보는 일

그런 날

하루치의 몸 속으론 맑고 선명한 방울소리가 한 무리

의 걸음에 얹혀져 아주 느리게 멀어지곤 했고,

마치 상여처럼

 

                                                                   (「식물의 장례2」)

  

 그곳에서 사람들은 “어두침침한 시간을 감으러 시계점을 찾고/몇몇은 조용히 마을을 빠져나와 겉장이 뜯겨지고 일몰만 너덜거리는 하루의 끝을 읽기 위해 바람의 도마 위를/ 낡은 생선처럼 오른다.”(「뜯겨나간 제목」)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 냉철함은 벽돌의 견고함을 뚫고 집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한다. 

 

 

벽돌 몇장이 헐리고

안과 밖의 온도를 차단해주던 스치로플이 동그랗게 오려나간

집의 내부를 들여다 보며 생각한다

우리가 드러눕고 엉거주춤 상체를 세워 바깥 날씨를 추측하고

한참을 서성이다가 귓속 방향기관에 고장이라도 생긴 듯

어디가 바닥이고 어디가 지붕이었는지 몰라

덜 깬 눈동자만 열고서 천장에 찍힌 꿈의 발자국을 따라다니던

수많은 날들, 벽으로 밀려난 채 고스란히 푸르러지고 있었음을

벽돌의 반대쪽을 들어 곰팡이로 피어난 잠의 습기들을 닦아낸다.

 

                                                          (「해부」)

    

 그는 집 벽의 안쪽과 바깥쪽이 더 이상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덜 깬 눈동자만 열고서 천장에 찍힌 꿈의 발자국을 따라다니던” 그 자리에서 “벽돌의 반대쪽을 들어 곰팡이로 피어난 잠의 습기들을 닦아낸다.” “벽돌의 반대쪽”을 상상하는 그 순간, 그곳은 아이러니의 시각이 사라지는 소실점이 된다. 안온함의 습기들을 닦고 그 집을 나온 시인은 사람들의 다른 면을 보게 된다.

  여기서 박경원이 시인으로서 갖는 놀라운 자질을 만나게 된다. 그의 자질은 단순히 그가 감수성과 상상력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아니다. 이러한 자질은 시인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을 법한 것들이다. 정작 그에게 주목되는 것은 자신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인간 사이의 소통과 연대성을 확대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통과 연대성이라는 어휘가 어느 장사치나 끼어 파는 물건처럼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지만, 그 차례가 그에게 돌아왔을 때 그것들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한 사람이 어떻게 또 한 사람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인류의 이런 영원한 주제 앞에서 박경원은 어느 사내의 “어깨 근처”에 새겨져 있는 문신에 눈을 부쳤다.

 

 

런닝셔츠 너머

박스를 나르는 사내의 어깨 근처가 심상치 않다

성깔있게 붉어진 근육과 근육 사이

하트 모양에 담긴 사랑이란 글씨가 큐피트의 화살을

맞고서 부르르 떨고 있다

얹힌 짐짝에 눌려 그 사랑 다시는 추억할 수 없을 듯

그 사내 과거 속 사랑을 폭력처럼 혹사하고 있다

천천히 뭉쳐지다가 한순간 꿈틀댄다

비틀비틀 중심을 잡다가 우지끈 뒤틀린다

새겨진 박스 자국을 툭툭 털며

노끈에 눌린, 깨진 사랑의 부위를 몇 번이고 어루만진다

살 속 깊이 묻어야 할 추억의 영수증이라도 되듯이

유독 발달된 상체를 그 좁은 하트 속으로 구긴다

벌겋고 두드러진

사랑의 표피층에 물집이 고이기 시작한다

아기의 사타구니에 번진 습진처럼 붉은 연꽃이 핀다

곧 불타버릴 것 같은 저 사랑, 혹은 무늬만 사랑 아닐까

 

                                                      (「문신」)

  

 이 붉은 문신이 하필 “성깔있게 붉어진 근육과 근육 사이”에 있는  “하트 모양”에 “큐피트의 화살”을  맞고 있는 형상이었을 줄이야. 대개의 사람들은 그 사내의 문신으로부터 불량스러움을 떠올릴 것이다. 애초에 그 문신은 철없는 시절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보이려 하였거나 혹은 스스로를 강하게 보이려는 위악(僞惡)에서 시작한 서툰 짓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쩌면 그것을 배제나 소외의 징표로도 볼 것이다. 지금 이 문신은 그의 삶 전체를 그의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도록 하는 스티그마임에 틀림없다.

  고대의 노예주들은 자신의 소유물인 노예들을 확인하려고 스티그마를 찍었다고 한다. 노예주에게 그것은 소유권의 표식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에게 그것은 분명 진한 상처였다. 혹은 자신에게 우연히 남겨진 고유한 상처가 도리어 평생 짊어지어야 할 스티그마가 되기도 한다. (Goffman, 『Stigma』, Totchstone, 1963)

  그런데 박경원은 이 스티그마에 말을 걸기 시작한다. “얹힌 짐짝에 눌려 그 사랑 다시는 추억할 수 없을 듯 그 사내 과거 속 사랑을 폭력처럼 혹사하고 있다.” 버려진 사랑의 스티그마를 그는 안타깝게 바라본다. “천천히 뭉쳐지다가 한순간 꿈틀댄다/ 비틀비틀 중심을 잡다가 우지끈 뒤틀린다.” 그 되살아날 것 같지 않은 가슴은 “새겨진 박스 자국을 툭툭 털며/ 노끈에 눌린, 깨진 사랑의 부위를 몇 번이고 어루만진다.”

  그는 이 스티그마에서 그의 사랑을, 그래서 자신의 사랑을 추억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자신보다는 많은 부분 그 사내에게로 기울어져 있다.

 

 

어깨와 팔꿈치 사이

유난히 선명한 문신 자국의 사내가 더디 끓는 뚜껑을 덮으면서

기다림의 반도막을 젖은 연기에 날린다

고압선이 넘어오는 푸른 등성이와 하늘 사이의 공제선을

훅 지워버린다

흉이란 지워지지 않는 근육의 비표다

누군가 세월 저쪽의 사연을 불태우고 있는 기억의 소각장이다.

붉고 자줏빛을 띠는 살의 창틀에 담긴 유년시절의 우두 자국같은,

때로는 슬픈 이별도 그 안에 버려지고

때로는 충혈된 흉기도 그곳에서 발견된다

그 근처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고압선에서」)

  

 시인은 그를 고압선 아래에 가면 만날 수 있을 지 안다. 그 사내에게 “지워지지 않는 근육의 비표”가 “누군가 세월 저쪽의 사연을 불태우고 있는 기억의 소각장이”며, “때로는 슬픈 이별도 그 안에 버려지고/ 때로는 충혈된 흉기도 그곳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시인은 안다. 이 꺽음 높은 통찰력 앞에서 문신은 더 이상 그의 것만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향기 잃은 꽃무늬, 몇 개의 표정을 흉기처럼 다루던 덩치 큰 문신들이/손가락 끝 얇게 박피된 지문 속에서 인광처럼 빛난다.”(「삼복」)

  

어느 누구도 상처를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유독 민중에게만 그 상처는 밖으로 드러나 스티그마가 된다. 대학에 못간 것도 그의 상처이다. 제대로 된 직장을 잡지 못한 것도 그의 상처이다. 더욱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 상처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그 상처가 스티그마로 드러나 다른 사람의 조롱의 대상이 되었을 때이다. 

  그래서 이해받을 길 없이 예단된 그들이 배운 것은 분노뿐이다. 그 분노조차 식물처럼 삭이는 법만을 지혜처럼 여겨왔던 그들이기에 그들의 손에 쥐어지는 것은 늘 “돌” 대신 “주먹”뿐이었다.

 

 

일생 주먹 외엔 그 무엇도 쥐어 본 적 없는 쪽은

주먹에 쥐어진 자신의 분노에 찬 그림자에 놀라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는 법도

주먹에 쥐어진 자신의 단단한 복수심을 들어

용서 저편으로 힘껏 날려버리는 법도 없다

……중략…

어디에선가 허다하게 쥐어본 것도 같은

그러다가

돌은 떠나고 주먹만 홀로 용서를 배운 것 같은

 

                                        (「돌과 주먹」)

  

 그러나 그들의 식물성으로 이루어진 삶은 “주먹에 쥐어진 자신의 분노에 찬 그림자에 놀라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는 법도/ 주먹에 쥐어진 자신의 단단한 복수심을 들어/ 용서 저편으로 힘껏 날려버리는 법도 없다.” 이것은 순수한 관용으로부터 나온 용서의 위선과는 다르다.

 

 

…(상략)…

있다가 없어진 길은 눈물의 길이다

눈을 퍼내면 어딘가에 묻혀 잇을 옷가지들, 그러나 질끈 감는다

눈물만은 그러나 침수된 채 그 속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

 

                               (「복도의 입구」)

  

 그렇다고 분노를 불타오르게 하는 충동의 부채질도 아니다. 시인은 삶의 저변에서 고요하게 견디면서 자신을 해결하는 법을 익히라고 권유한다. 시인은 이 경계를 넘지 않으려한다. 일상의 느린 흐름 속에서 끈질기고 짙은 인내를 통해 좌절을 거듭 일으켜 세우는 작은 행위들을 그는 “위대한 움직임”으로 느끼게 한다.

 

 

체험의 즐거움을 일으켜 세울 다리는 오래 전 누워 버렸다

휴식에 들어간 혈압과 굳은 근육의 모통이들, 이미 무덤이 된

저 아래 세상은 일생 한번도 밟아 본 적 없는 낯선 땅 같다

척추의 어느 쯤에서 말소됐다는 의사의 소견도 지워진 지 오래다

지금은 다시 오른쪽을 내리고 왼쪽 무릎을 세울, 숨가쁘고

 

(「위대한 움직임」)

  

 이 움직임의 한 켠에 그가 삶에 내놓는 치유의 대안은 결코 특별하지 않다. 우리 삶의 고정된 정향성을 잠깐 멈추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구원은 가까이 있다. 그 노력은 호흡을 한 치 쯤 멈추어 서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그 순간 삶의 각박한 충동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다. 

 

 

소나기 구름이

동쪽 능선에

발을 담근다

나는 서둘러

시집을 펼쳐

그 산의 슬픔을

읽는다       

 

(「잠깐의 한눈」)

 

그리고 이 시야의 지평선에는 다음과 같은 평화의 공간이 존재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한 여인이 창가에 앉아

겨울 스웨터를 풀어

봄 햇살을 짜고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 보이지 않고

그녀의 아이 보이지 않고

그녀의 집조차

어디론가 날아간 것 같은

오전, 나는 잠깐 동안

삶을 멈추고

세상의 첫 번째 주소를

봅니다

 

                   (「몸 일번지」)

  

 "겨울 스웨터를 풀어/ 봄 햇살을 짜고 있"는 그 여인에게서 그가 찾아 왔던 것을 이미 구했는지도 모른다. 몸 밖의 세계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순간 시집을 펼친 것이고 그곳에서 그의 슬픔을 읽은 것이다. 우리 삶과 서걱되던 지식의 욕망이 가라앉은 곳에서 세계와 진정코 화해하고자 하는 몸의 움직임을 여기서 읽게 된다. 이것은 그가 추구해온 긴 역정에서 볼 때 너무나 당연한 귀착지이다. 

 

 

김 혁 (역사학자, 평론가, 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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