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는 밟히면 마비된 과거를 잘라

산성의 메아리

언어의 조각사 2009. 4. 26. 16:07

산성의 메아리

                            김영미


남한산성 삼십 리 성벽 길에는

병자호란 함성이 *여장마다 깃들었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회한의 눈물

지수당地水堂에 고인 혼 불로 뜨고

연무관演武館 겹처마 위 산새소리

무사의 혼과 기백 실어 나르며

‘창을 베개 삼는다’는 침괘정枕戈亭을 흔든


햇볕이 들지 않던 서러운 이름들이

성곽마다 이끼로 피어났을까

솔숲에 묻힌 눈부신 절망이

산성을 지키는 메아리가 되었다


오랜 세월의 칼바람을  버틴 소나무

외세에 항거하던 남한산성 닮았다

기억에서 멀어진 이름의 풀꽃들도

꽃 진 자리마다 푸른희망 부풀린다


작은 것에 안달하는 나를 비웃 듯

물에 떠밀리는 제 그림을 낚던 담쟁이

적병처럼 성벽을 기어오른다

세차게 우짖는 산새들,

입안 역사책이 멀미를 한다


2003.08.11

*여장- 성벽 상부에 설치된 담장으로 몸을 숨기며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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