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는 밟히면 마비된 과거를 잘라

할머니의 누릉지

언어의 조각사 2009. 4. 26. 16:12

할머니의 누릉지

                                                 김영미


그리움에 침몰하는 가슴 한켠으로

향수의 빛 여울이 일렁인다

이산으로 앓아누운 휴전선 따라

고향마을 골목길을 더듬더듬 맴돌며

추억의 군불을 지피는 할머니


할머니 속처럼 까맣게 탄 부지깽이

망향의 한으로 달궈진

무쇠 솥 궁둥이를 긁는다

불 조각은 사위어가던 잿불 사르며

고향하늘 별빛 되어 흩뿌려진다


이 누릉지 용천말 애들에게 나눠주고 싶다

‘나 어릴 적, 누릉지 한 조각은...’

피난 때 이고 온 가마솥에서 고향을 맡는

할머니 눈에 불빛이 일렁인다


휴전선처럼 침묵하던 속곳에서

고향 갈 여비로 꼬깃꼬깃 접어둔

쌈짓돈 털어내 의연금에 보태며

마음볕으로 곱게 말린 누릉지를

용천행 구호품에 실어 보낸다


“고향산천 그리워 죽을 수도 없다”는

할머니 마음이 용천말 하늘 아래

동심을 따라가며 울먹이고 있다


200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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