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분실하다
- 이정원
어느날 잘못 내린, 지하철
2호선 강남역 3번 출구 뭉글뭉글 봄은 빌딩 숲에서도 피어나나 기중기한대 나무등걸에다 가지를 뻗고 있다 호주머니 많이 달린 바지가 좋았던 적이 있었지 5월이면 완공된다는 S사옥의 유리창들이 잘 길들여진 구슬처럼 반짝인다 오라비들이 숨겨두었던 뒷구덩 보물들이 꿈을 실현할 것일까 날마다 기중기에서 싹이 자라고 호주머니 많이 달린 바지를 찾으러 삼삼오오 여자애들은 새새거리며 공중을 떠다녔다 어느 한때는 부품공장 여공이 되는 게 꿈이었던 적도 있었고 미싱사가 되어 옷마다 주머니를 달고 싶어 하기도 했었다 어느 것 하나 이루지 못한 나는 죽도록 사랑하다 버림받는 3류 소설의 여자가 되어 그사내 남기고간 활자를 고르는 지금은 편집증 환자 오피스텔 15층, 내 편집증을 달래주는 젊은 남자 이니셜 박힌 와이셔츠가 풍선처럼 빵빵하다 저러다 터져버리기라도 해서 그 내장 속 이니셜들 다 튀어나오면 어쩌나 HZ.HZ.HZ.HZ.HZ 호주머니를 장만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푸른 잎사귀들이 큭큭큭 웃음을 밀어 넣는다 언제쯤이면 저 기중기에도 열매가 열리나 빛이 반짝이자 한꺼번에 우우우 소리를 내는 유리창들 작년에 떨어진 낙과 한 알 시큼시큼 썩어가는.
문득 잘못 왔다는 생각
아니, 처음부터 엇갈렸다는 생각 강남역
3번 출구는 기억 불, 시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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