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티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그룹명 > 좋은 글 훔쳐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0) | 2022.04.28 |
---|---|
산벚나무를 묻지마라/ 임경림 (0) | 2022.04.14 |
물 같은 사랑/ 최승규 (0) | 2022.04.01 |
그리운 약국 / 배정원 (0) | 2022.02.28 |
해묵음에 대하여 / 박경원 (0) | 2022.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