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4월의 꽃이라면 어머니는 모두 내어주고 하늘을 품고 있는 빈 들녘처럼 넉넉한 가을입니다.
혹한 속에서 싹을 틔우고 비바람 모진 가뭄을 견디며 피었다가 슬며시 지는 꽃을 바라보면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열매를 향한 그 숭엄한 추락이 아름다운 건 꽃내림을 통해 어머니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안의 물기를 거두며 꽃잎 떨구는 4월은 필시 꽃들의 영구차일 겁니다.
당신의 봄날과 온 생애를 자식에게 내어주고 텅 빈 주머니를 흐뭇해하는 황혼의 어머니는 가을을 닮으셨지요.
풋풋한 향기로 싱그럽던 여인의 꽃물 말리며 4월에 태어난 나는 어머니에겐 기나긴 기다림의 존재였지요.
결혼 10년 후에야 저를 낳으셨으니 대를 잇지 못한 시집살이가 오죽하셨을까만
여심의 꽃물 내려 사랑을 심은 모성의 밭에는 당신의 마른 꽃잎이 추억이 되고 전설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란 이름으로 가난의 세월을 푸근하고 넉넉한 추억으로 채워주신 그 희생으로 딸과 딸의 딸들은 꽃으로 피어납니다.
가을이면 어머니 생신을 축하하며 육남매가 당신 품속으로 찾아들곤 하지요.
마냥 든든하기만 하던 어머니가 작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신장암 수술로 한쪽 콩팥의 몸으로도 꿋꿋하시더니,
뇌출혈수술로 기억이 혼미해 진다며 치매의 공포 속에 당신을 가둔 후부터입니다.
치매로 자식들 힘들게 할까봐 쌈짓돈을 털어서 뇌 영양제를 사고 치매예방주사를 맞으며
스스로를 치매라고 불안해하시는 모습이 안타깝고 아픕니다.
가을 하늘이 습기를 머금고 곧 터질듯 하여 우산을 챙겼던 산책길에서 비를 만났습니다.
채 젖지 못한 나뭇잎의 바스락대는 소리가 듣기 좋아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걸었습니다.
우산 위로 구르는 빗소리와 발장단에 맞춰 내지르는 낙엽의 하모니가 숲의 음계를 켜며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었지요.
숲길을 오를 때 낙엽 밟는 소리가 소프라노였다면 내려오는 발소리는 중저음의 바리톤이었어요.
청춘의 시듦을 서러워 않고 새움의 자양분으로 기꺼이 몸을 던진 낙엽의 노래로 가을은 풍요롭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살다보면 햇살 가득한 화창한 날도 많지만, 비바람을 만난 듯 춥고 서럽던 날도 있었지요.
그 굴곡 속에서도 외롭거나 두렵지 않게 난관을 통과할 수 있었던 건 든든한 어머니의 응원과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이젠 우리 육남매가 엄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드릴게요.
가끔 정신이 흐려지는 것 같다고, 건강이 나빠져서 자식들 힘들게 할까봐 걱정된다고
새벽에 일어나면서나 잠자리에 들 때마다 "이제 그만 당신을 주님 곁으로 불러달라고 기도 한다"고 하셨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갓난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자식들 보살피며 든든한 어머니로만 살아 오셨으니
이젠 어른이 된 육남매가 어머니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설혹 치매로 아기가 된다 해도 당신은 영원한 어머니이십니다.
비오는 날에 밟히던 낙엽의 소리가 신음소리가 아닌 음악소리로 느끼듯이
그때그때의 상황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요.
단 하나 변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시작은 어머니로 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상황이든 나쁜 상황이든 우리에겐 변함없는 엄마, 어머니라는 존재로 인해 뜨겁게 뭉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당신의 꽃밭에 오래도록 머물러주셔요.
당신은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사랑입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2018년 9월 착각의 시학(여류시인 8인의 감성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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