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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만남

언어의 조각사 2013. 1. 29. 00:33

시래기 한 웅큼/   공광규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 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를 한 움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치는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막무가내 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멱살 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화해시켜 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 몫 보려는 식당 주인은

그 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 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이 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평생 주먹다짐 한번 안 해본 산골 출신인 그는

찬 유치장 바닥에 뒹굴다가 선잠에 들어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부시럭거리는.

 

-그리움을 훔쳤다 / 수정본-

 

스토리문학 발행인 김순진시인의 초대로 문학행사에 갔다가  공광규 시인을 만났다. 문학강의를 위해 오셨을 때의 광주를 회상하며...

이 사진은 꼭 울랑에게 보내주라는 당부의 말씀까지..ㅎㅎ 

 

 

어머니께·1

 

 

 

어머니

겨울 강가에 갔었지요

흐르는 강물 앞

모가지 드리우고

마른 풀잎에 베여 신음하는

바람을 보았어요

 

강과 만나는 것들은

강물 따라 시늉하며

강 모습으로

바다를 만나고 싶어하데요

 

속으로 타는 불기둥도

강에게 기울어

강물로 흘러들기를

하여, 어떤 평원과 만나기를

 

그리고 어머니

강 풀섶

마른 갈대들도 보았지요

 

키 큰 몸짓으로

겨울을 태우는 모습은

끝가지 제 하늘 지키는

꽃보다 아름다운

반란이었어요.

 

- 시집 『대학일기』에서

 

 

 

 

 

아름다운 기둥

 

 

법당 받치고 있는

저 기둥 참 아름답다

한때 연약한 새싹이었으나

아름다운 법당 받치고 있다

 

나 어렸을 때

세상 받치는 기둥 되기로 결심했었다

그러나 지금

아무것도 못되고 벌써

한 가계에 등이 휘었다

 

내 휜 등에 상심하다

저 법당기둥 보고

누구나 세상 한쪽 받치고 있는

아름다운 기둥임을 안다

 

그러고 보니 원망만 했던 우리 아버지

법당 기둥이었다

가난한 가계를 힘겹게 받치다

폐가 썩어 일찍 지상에서 무너진

아름다운.

 

- 시집『지독한 불륜』에서

 

 

 

 

 

소주병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 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 시집『소주병』에서

 

 

 

 

 

월미도

 

 

 

낡은 포장마차가 우울을 달래고 가라며

양철 연통으로 입김을 호호 불어댄다

가게에서 흘러나온 흘러간 노래가

해변의 곡선을 따라 흘러 다닌다

흘러간 세월을 파는 가게는 없는 걸까?

잘못 걸어온 나이가 막막하여 온몸을 떤다

너,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안 된다며

허공의 뺨을 후려치는 선창의 깃발

맞는 건 허공인데 내 뺨이 더 아프다

카페의 붉은 등이 충혈된 눈으로

기우뚱거리는 난파선 한 척을 바라본다

흐린 별도 내가 측은한지

눈물을 글썽이며 내려다본다

그래, 너는 정말 잘못 살고 있어!

파도가 입에 거품을 물고 나에게 충고한다

나의 개 같은 삶을 물어뜯으려고

이빨을 세워 부두에 기어오르는 파도

달빛이 튀는 얼음을 우두둑 우두둑 밟으며

회한의 뼈가 부러지는 내 몸의 지진을 듣는다.

 

- 시집『소주병』에서

 

 

 

 

 

아름다운 사이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가

가지를 뻗어 손을 잡았어요

서로 그늘이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사이여요

 

서로 아름다운 거리여서

손톱을 세워 할퀴는 일도 없겠어요

손목을 비틀어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서로 가두는 감옥이나 무덤이 되는 일도

 

이쪽에서 바람 불면

저쪽 나무가 버텨주는 거리

저쪽 나무가 쓰러질 때

이쪽 나무가 받쳐주는 사이 말이어요.

 

-『현대시학』2004년 11월호에서

 

 

 

 

 

시간의 마차 위에서

 

 

 

마부가 말했다.

지금 마차는 사십 오세 역을 지나고 있습니다.

나는 마부에게 항의했다.

왜 이렇게 빨리 지나는 거요, 이건 내가 원하는 속도가 아니오.

마부는 말했다.

이봐요, 손님. 속도는 당신 주민등록증에 써 있소. 쯩을 까보시오.

나는 쯩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마부에게 떼를 썼다.

억울해요, 좀 천천히 가거나 마차를 멈춰주시오.

마부는 근엄하게 말했다.

이 마차는 속도를 늦추는 법이 없소. 내리면 다시 탈수도 없구요.

나는 더욱 놀라서 마부에게 졸랐다.

그렇다면 시간을 파는 가계를 찾아주시오.

돈은 얼마든지 있어요.

몸과 영혼과 시간을 다 바쳐서 번 돈 말이오.

시간을 살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당신에게 주겠어요.

마부는 심각하게 말했다.

글쎄요,

이 마부조차 시간을 파는 가게가 있다는 얘기를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소.

그러나 당신의 용기가 가상하니 찾아보죠.

마부는 채찍을 마구 휘둘러대고,

마차는 더욱 빠른 속도로 시간을 파는 가게를 찾아서 달리고 달렸다.

마차의 속도는 갈수록 더 빨라졌고,

시간을 파는 가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너무 빠른 나머지 나는 겁이 나서 마부에게 소리쳤다.

여기서라도 당장 내려주시오, 어서! 제발...

마부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죠,

늙은이.

이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당신은 꽥이요.

 

 

-『작가와 사회』 2004년 겨울호에서

 

 

 

 

 

꽃나무

 

당신이나 나나

겨울 산에 사는

꽃나무였군요

 

온갖 잡목과 섞여

자기가 꽃나무이면서도

꽃나무라고 말하지 않는 겨울 꽃나무

 

이른 봄에 확!

자기를 불지르다

신록으로 다시 몸을 감추는 꽃나무

 

당신이나 나나

꽃나무이면서도 꽃나무라고 말하지 않고

온갖 잡목과 섞여 사는 꽃나무.

 

 

-『시현실』2005년 여름호에서

 

 

갈대로 서서

 

 

 

세상 갈대로 서서

한번 흐느껴보자

 

누가 더 섦고 애통한지

옆 갈대와 슬픔의 키도 대보자

 

바람 심한 날이면

같이 부퉁켜 안고 울다가

 

저기 먼저 바람에 꺾여

강물에 실려가는 갈대가 보이거든

잘가라 손 흔들자

 

내가 먼저 꺾여 실려가도

미련 없이 떠나자

 

먼저 떠날수록

더 넒은 평원에 먼저 닿으리.

 

- 시집『마른잎 다시 살아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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