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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정영희-

언어의 조각사 2012. 5. 16. 11:27

 

끈 / 정영희

 

 

 

쇠죽 쑤는 저녁이었다

집집마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쌀 앉히는 소리로 마을이 저물면

밤이 이슥 하도록 두렁두렁 눈이 내였다

국화송이 같은 눈송이를 툭툭  털어내며

혈족들 하나 둘 모여 들고

풀 먹인 밤을 와시락와시락 눈이 내려

창호지 밖은 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다

시릉 위에 넍혀 있던 해묵은 이야기로

오촌 당숙은 18대조 할아버지 이야기로

눈 내리는 장백산맥을 한 달음에  뛰어넘고

엄마와 숙모는 치맛자락도 펄럭이지 않고

광으로 부억으로 걸음이 분주했다

작은 아버지는 밤을 치시고

흰두루마기 입으신 아버지

먹을 갈아 지방을 쓰셨는 데

타닥타닥 발간 화롯불 온기 속으로

한번도 보지 못한 고조 할배 다녀 가시고

슬하에 자식 없던 증조  할매

눈물바람으로 다녀 가시고

나이 열여엿에 절손 된 집안에 양자로 오신  할아버지

그 저녁에 떨어진 벌건 불 화로에

다리 절룩이며 다녀 가시고

눈이 까만 아이들이 잠을 설치는 밤

뒤란 대숲에는 정적이 한자나 쌓였다

긇어질 듯 이어지는 눈을 맞으며

오늘도  눈 푸른 열 여섯살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들이

쿵쿵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2011년 - 동양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