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 / 정영희
쇠죽 쑤는 저녁이었다
집집마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쌀 앉히는 소리로 마을이 저물면
밤이 이슥 하도록 두렁두렁 눈이 내였다
국화송이 같은 눈송이를 툭툭 털어내며
혈족들 하나 둘 모여 들고
풀 먹인 밤을 와시락와시락 눈이 내려
창호지 밖은 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다
시릉 위에 넍혀 있던 해묵은 이야기로
오촌 당숙은 18대조 할아버지 이야기로
눈 내리는 장백산맥을 한 달음에 뛰어넘고
엄마와 숙모는 치맛자락도 펄럭이지 않고
광으로 부억으로 걸음이 분주했다
작은 아버지는 밤을 치시고
흰두루마기 입으신 아버지
먹을 갈아 지방을 쓰셨는 데
타닥타닥 발간 화롯불 온기 속으로
한번도 보지 못한 고조 할배 다녀 가시고
슬하에 자식 없던 증조 할매
눈물바람으로 다녀 가시고
나이 열여엿에 절손 된 집안에 양자로 오신 할아버지
그 저녁에 떨어진 벌건 불 화로에
다리 절룩이며 다녀 가시고
눈이 까만 아이들이 잠을 설치는 밤
뒤란 대숲에는 정적이 한자나 쌓였다
긇어질 듯 이어지는 눈을 맞으며
오늘도 눈 푸른 열 여섯살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들이
쿵쿵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2011년 - 동양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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