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없다 / 박송이*한국일보
우리의 책장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15층 베란다 창을 뚫고 온 겨울 햇살
이 창 안과 저 창 밖을 통과하는 새들의 발자국
우리는 모든 얼굴에게 부끄러웠다
난간에 기대지 말 것
애당초 낭떠러지에 오르지 말 것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갖지 못한 채
알몸으로 동동 떨었다
지구가 돌고
어쩐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면서
체위를 어지럽게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멀미를 조금씩 앓을 뿐
지구본에 당장 한 점으로
우리는 우리를 콕 찍는다
이 점은 유일한 우리의 점
우리가 읽은 구절에 누군가 똑같은 색깔로 밑줄을 그었다
새들은
위로 위로
날아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들의 발자국에게 미안했다
미끄럼틀을 타는 동안
우리의 컬러링을 끝까지 듣는 동안
알몸이
둥글게 둥글게
아침을 입는 동안
우리의 놀이터에
정작 우리만 있다
할머니의 눈썹 문신 /
강은진*문화일보
문득, 썩지 않는 것이 있다
74세 이만호 할머니의 짓무른 등이
늦여름 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중에도
푸르스름한 눈썹은 가지런히 웃는다
그녀가 맹렬했을 때 유행했던 딥블루씨 컬러
변색 없이 이상적으로 꺾인 저 각도는 견고하다
스스로 돌아눕지 못하는 날
더 모호해질 내 눈썹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울까
목에 박힌 관으로 바람의 리듬을 연습할까
아니면 당장 도마뱀 꼬리같은 문신을 새길까
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 왔다가 가고
저렇게 맨얼굴로 누워 눈만 움직이는 동안
내 등은 무화과 속처럼 익어가겠지만
그 때도 살짝 웃는 눈썹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이 검어질수록 더 발랄해지는 눈썹이었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의 바다에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가져야 하리
눈물나도록 푸른 염료에 상큼하게 물들어야 하리
나무의 문 / 김
후인 *부산일보
몇 층의 구름이 바람을 몰고 간다
그 몇 층 사이 긴 장마와
연기가 접혀 있을 것 같다
바람이 층 사이에 머무르는 種들이 많다
發芽라는 말 옆에 온갖 씨앗을 묻어 둔다
여름, 후드득 소리 나는 것들을 씨앗이라고 말해본다
나는 조용히 입 열고
씨앗을 뱉어낸 최초의 울음이었다
오래된 떡갈나무 창고 옆에
나뭇가지 같은 방 하나 들였다
나무에 걸린 바람을 들여놓고 싶었다
지붕이 비었을 때엔 빗소리가 크다
빈 아궁이에 솔가지 불을 밀어 넣으면
물이 날아올랐다
물기를 머금고 사는 것들이
방안을 채울 줄 알았다
아궁이 옆에서 뜨거운 울음의 족보를 본다
실어 온 씨앗으로 바람은 키 작은 뽕나무를 키웠다
초여름, 초록이 타고 푸른 연기가 날아오르고
까만 오디가 달렸다
문을 세웠더니 바깥이 들어와
빈 방이 되었다
바람의 어느 층이 키운 나무들은 흰 연기를 품고 있다
어제는 나무의 안쪽이 자라고 오늘
나무의 바깥이 자랐다
나무는 어디가 문일까
문을 열어 놓은 나무들 마다
초록의 연기가
다 빠져나가고 있다
외출을 벗다 / 장요원*무등일보
한낮의 외출에서 돌아가는 나무들의 모습이 어둑하다
탄력에서 벋어난 하반신이 의자에 걸쳐 있고
허공 한쪽을 돌리면
촘촘했던 어둠들, 제 몸쪽으로 달라붙는다
의자의 각을 입고 있는 외출
올올이 角의 면을 베꼈을 것이다
이 헐렁한 停留의 한 때와 푹신함이 나는 좋다
실수를 엎질렀던 재킷과
몇 방울 얼룩이 튄 블라우스의 시간을 벗을 수 있는 헐렁한 집
여전히 외출들은 걸려 있거나 접혀져 있다
그러고 보면 문 밖의 세상은
모든 외출로 건축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빛도 식욕도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도 모두 외출에서 돌아와 있는,
텅 빈 건너편이 조용히 앉아있는 의자
침묵의 소요들이 모두 돌아간
세간들에 달라붙는 귀가한 소음들
왜 집안엔 깨어지기 쉬운 소리들만 있는 것인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저녁
오늘의 바깥은 다행히도 한 올의 올도 나가지 않았다
눅눅한 각을 입고 있는 스타킹과
긴 팔을 뻗어 아카시아 이파리를 헹구는 바람의 시간
잠든 몸을 조용히 돌아다니는 숨소리
괄호를 열고 몸을 구부리는 잠이 깊다.
아주 흔한 꽃 / 변희수*영남일보
갈 데까지 갔다는 말을
안녕이란 말 대신 쓰고 싶어질 때
쓰레기통 옆 구두 한 켤레
말랑한 기억의 밑창을 덧대고 있다
달릴수록 뒷걸음 치는 배경 박음질 해나가듯
나란히 하나의 길을 꿰고 갔을 텐데
서로 다른 기울기를 가진 한 짝
축을 둥글게 깎고 고르는 순간
길은 저마다 제 발에 꼭 맞는 문수로
열려 있었을 것이지만 떠날 때는
모두, 안개를 배경으로 걸었을 것이다
가파른 직선 혹은 곡선의 에움길을
밀어 넣을 때마다 팽팽하게 긴장하던 구둣볼
끈을 고쳐 매고도매듭 없이
결의만 다지던 저녁이 온 것처럼
코끝을 돌려놓고 자도
늘 잘 못 든 길처럼 헛갈리는 아침
이정표 없는 허방에도 덜컹, 꽃피는 길 있었는지
밑창에 찍힌 발가락 모양이 꾹꾹 눌러놓은
압화처럼 선명하게 피어 있다
어느 고대국가의 지층에 새겨진 족적처럼
누구나, 뒤축이 닿는 순간 스스로의 삶을
탁본하게 되는 것이므로
몫의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놓고
서늘하게 빠져나간 맨발
얼룩도 꽃의 흔적을 닮을 수 있는지
헐렁한 구두 속의 여백이 꽉 찬다
파밭 / 홍문숙*세계일보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제 한 몸 가려줄 잎들이 없으니 오후 내내 어둡다
다만
제 줄기 어딘가에 접혀있던 손톱자국 같은 권태가
힘껏 부풀어 오르며 꼿꼿하게 서는 기척만이 있을 뿐,
비가 내리는 파밭은 어리석다
세상의 어떤 호들갑이 파밭에 들러
오후의 비를 밝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경전선/송종규
내가 본 것은 분명히 비비새였는데, 비비새는
아득히 날아갔는데
누군가, 비비새가 아니라고 우겼다 비비새는
멀리 날지 못한다고, 그렇다면 비비새는 어디로 간 것일까
뼛속에서 흐린 풍금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하얗게 늙기 시작했고
상수리나무 새순을 입에 물고, 비비새가 돌아왔다
내 안에 조그만 무덤들이 우듬지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거기 환하게
애기똥풀 작은 꽃잎들과
가시연꽃 혹은 노랑어리연꽃이
아픈 뼈마디는 도대체 무엇을 기다린 것일까
대합실 의자 위에 널브러져 있는
저기. 작고 노란
토종 콩들
같은 시집에서..
두께
송 종 규
두루말이 화장지가 줄줄 풀려 나온다
황새냉이가 하얗게 중얼거린다
낙동강 백사장에 푹 삶은 광목 한 필씩 널어놓고
어머니들 깔깔거리며 아래로 떠내려간다
광목 위로 피라미 떼가 헤엄쳐 올라온다
고요에도 두께가 있다, 아주 두꺼운 고요가 이스트처럼
두루말이 화장지를 부풀린다
안개가 삼켰다가
확, 뱉아낸 한 장의 풍경 속으로
풀 먹인 이불 빨랫줄에 털어 널며
어머니들 돌아온다 중얼중얼 햇살 속에서
피라미 떼 투명한 알들이
튄다, 두루말이 화장지가 긴 물길 끌고 간다
송종규 시집 "녹슨 방", 민음사 2006
배를 밀며 /장석남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시선
찬란/이병률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하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이병률시집 "찬란" 문학과지성 2010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강연호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 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간이듯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
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강연호시인
1962년 대전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
199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비단길>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1995년 제1회 현대시동인상 수상.
우연 / 박제영
문상이란 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보다는 남은 자와의 관계를 지불하는 의식, 부조금이란 사자가 지상의 마지막 톨게이트를 지날 때 지불해야 할 통행료를 대납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남은 자들의 슬픔은 그러나 결국 죽은 자에게 닿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가속이 붙는다 시속 140킬로미터 어둠 속을 질주하는 것은 이 순간 무엇이지, 무엇, 퍽, 무인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고 일순, 어둠 속에서 제 몸을 드러낸 과속의 덩어리
갓길에 차를 세우고 담배 한대를 문다 꽃은 어디 가고 대궁만 남은 민들레를 보다가 낮게 엎드린 대궁을 흔들다가 문득 궁금해진다 풀 아래 뿌리쯤에서 이 순간 벌어지고 있을 우주운행에 관한 비밀들 - 벌을 잡아먹다 말고 도망치고 있는 스라소니거미와 제 몸을 말고있는 쥐며느리의 긴장에 대해서, 다음달 과태료를 내면 그 뿐일 이 우연한 사건에 대해서
박제영 시인
강원도 춘천 출생
1992년 ‘시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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