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거시대 [1993년 동아일보]
1
어쩌다 집이 허물어지면
눈이 부신 듯 벌레들은
꿈틀 돌아눕는다
똥오줌은 어디에다 버릴까
집안 가득 꼴이 아닐텐데
입구 쪽으로 꼭꼭 다져 넣으며
알맞게 방을 넓혀간다
고추에는 고추벌레가
복숭아 여린 살 속에는 복숭아 벌레가
처음부터 자기 집이었으므로
대물림의 필연을 증명이라도 하듯
잘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으며
집 한 채씩 갖고 산다
벌레들의 방은 참 아늑하다
2
PVC 파이프 대림점 옥상엔
수많은 관들이 층층을 이루고 있다.
아직은 자유로운 입으로 휘파람 불고
둥우리를 튼 새들 관악기를 분다
아귀에 걸린 지푸라기나 보온 덮개 쪼가리가
빌딩 너머 먼 들녘을 향해 흔들린다
때론 도둑고양이가 올라와
피묻은 깃털만 남기고 가는
문명과 원시의 옥상으로
통이 큰 주인아줌마가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또 몇 개의 관이 땅 속이나 콘크리트 사이에서
우리들의 쓰레기나 소음으로 배를 채울 것이다
그리하여 관을 타고 온 것에는
새끼 잃은 어미 새 소리가 있고
회오리치는 바람 소리가 있고
도둑고양이 이빨 가는 소리가 뛰쳐나온다
피묻은 둥우리, 숨통을 막는
보온덮개의 질긴 터럭이
우리들 가슴에 탯줄을 늘이고,
PVC 파이프 그 어두운 총신들이
퀭한 눈으로 꼰아보고 있다
3
우리들의 가슴속에도
제 집인양 덩치를 키워온
수많은 벌레들 으쓱거린다
햇살 반대편으로 응큼 돌아눕는
그들과 우리는 낯면이 많다
코를 풀고 눈곱을 떼내며 아침마다
우리는 벌레의 집을 청소한다
그들의 방으로 채널을 돌리고 보약을 넣고
벌레의 집은 참 아늑하다
............................................
▶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신경림 , 김주연
우열을 가리기 힘든 가운데 '혈거시대'가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벌레들의 방과 사람의 방, 우리들 가슴속의 방을 일상의 평이한 언어로 연결하는 가운데 부각되고 있는 상징성은 소박하면서도 독특하다. 시적인 포즈나 허세가 애초부터 배제된 분위기 속에서 삶을 사랑과 달관으로 마주보는 그윽한 눈길이 믿음직스럽다. 그 눈길 속에는 그러나 아둥바둥하며 살아가는 공해에 찌든 현실에 대한 묵시록적인 비판이 숨어있다. 결국 이러한 점이 높이 평가되어 당선작이 되었는데,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의 활동을 기대한다
▶ 이정록
1964년 충남 홍성 출생. 공주사대 한문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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