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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에 빠진 의자 외... / 유종인

언어의 조각사 2010. 6. 9. 00:02

저수지에 빠진 의자 / 유종인 



낡고 다리가 부러진 나무 의자가

저수지 푸른 물속에 빠져 있었다

평생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아온 날들을

살얼음 끼는 물속에 헹궈버리고 싶었다


다리를 부러뜨려서

온몸을 물속에 던졌던 것이다

물속에라도 누워 뒷모습을 챙기고 싶었다


의자가 물속에 든 날부터

물들도 제 가만한 흐름으로

등을 기대며 앉기 시작했다

물은 누워서 흐르는 게 아니라

제 깊이만큼의 침묵으로 출렁이며

서서 흐르고 있었다


허리 아픈 물줄기가 등받이에 기대자

물수제비를 뜨던 하늘이

슬몃 건너편 산 그림자를 앉히기 시작했다


제 울음에 기댈 수밖에 없는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

둥지인 양 물고기들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1968년 인천 출생

1996년 계간 '문예중앙' 시부문 당선

200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

시집 <아껴 먹는 슬픔>, <교우록> 등

 

 

                                                                     

 아껴 먹는 슬픔

 

재래식 화장실 갈 때마다

짧게 뜯어가던 두루마리 화장지들

내 밑바닥 죄를 닦던 낡은 성경책이 아닐까

떠올린 적이 있다


말씀이 지워진 부드럽고 하얀 성경책 화장지!

외경의 문밖에서 누군가 나를

노크할 때마다 나는

아직 죄를 배설 중입니다 다시

문을 두드려주곤 하였다


바닥난 화장지, 어느 날 변기에 앉아

내 죄가 바닥나버린 허탈에 설사라도 나는

기분에 울먹인 적이 있다


그러나, 천천히 울어야지

저 문밖의 가을, 깃동잠자리 날개 무늬를 살필 수 있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머리에 토란잎을 쓰고 가는 아이처럼

슬픔에 비 맞아 가는 것도

다 구경인 세상이듯이


때론 맨발에 질퍽이는 하늘을 적시며



                                       

 

 

팝콘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꽃

꽃은 열매 속에도 있다

단단한 씨앗들

뜨거움을 벗어버리려고

속을 밖으로

뒤집어쓰고 있다

내 마음 진창이라 캄캄했을 때

창문 깨고 투신하듯

내 맘을 네 속으로 까뒤집어 보인 때

꽃이다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속을 뒤집었다, 밖이

안을 들어왔다, 안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꽃은

견딜 수 없는 嘔吐다


나는 꽃을 집어먹었다


 

 

 

 

 

 

그 여름의 삽화   - 마리아와 여인숙   

 

어머니는 가위를 오래 들고 계셨다 아버지의 사진이

열심히 오려지고 있었다 흑백의 청춘들,

먼지의 하숙생들이 사는 왜식(倭式) 사택은

밤마다 울음의 거대한 창고, 사람의 살 냄새 그리운 유령들

밤고양이 등을 타고 내려온다는 나무 계단은

폐허의 입구에서 윤이 나고 있을 뿐 어머닌

무수한 가위질로 젊음을 잘라냈다

전처(前妻)를 알 수 없는 세월, 나는 그 중의 한 아이

다리 밑에서 그러나 사타구니 밑에서 결국 우연 밑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오래도록 가위를 들고 계신다

오려지는 증오, 오려나가는 환멸, 창녀의 딸이

나와 놀기를 원했을까 이웃집 장교의 딸년이

물질의 저 낯선 얼굴로 나를 부를 때, 나는 버렸다

이미 떠났던 것을 다시 불렀다

뿌리가 드러난 오래된 소나무들 먼지의 여인숙을 폐허를

환난으로 감쌌다, 아버지 낯선 길로 나를 몰았다 나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 유치한 아이들 어른은

너무 굳었다 자랄 대로만 자란 아이들, 어른은

아버지로 충분했다 그래서 바람이 바람을 피우는 집,

어머니 수시로 하느님에게 날아갔다 통곡하는 침묵을

밤마다 눈에 담았다 가위로 촛불을 잘랐으나 촛불은

가위를 검게 그슬렸다 마리아, 동정녀 마리아 어머니

아무것도 배지 않는 저 젖소들은 모두 동정녀 아니아니

창녀 같은 것, 수태고지(受胎告知)의 날들을 기다렸다

비가 오고 오래된 집은 검버섯이 늙은 청춘이

늘어갔다, 누이들은 정신과 환멸의 몸을 팔러 학교로 도시로

정신 병원으로 가고, 나는 강간당한 마리아, 어머니와 함께

개떡을 만들어 먹었다, 텅 빈 축사 한 켠을 거느린

이 왜식 사택은 먼지의 농아(聾兒)들로 북적거렸다 떠난

불임(不姙)의 소들이 내내 영원의 풀잎을 찾아 눈발 속으로

끝나지 않는 동정(童貞)의, 그러나 저 저녁 불빛에 검붉게 드러난

식욕의 땅, 푸줏간마다 어머니의 순결이 은빛 갈고리에 걸려 있었다

 



 

 

 

껍질의 길

 

어제 벗겨 먹은 귤껍질이

방바닥에 뒹굴고 있다 쪼글쪼글

점점 더 말라가고 있다

틀니를 들어내면 합죽이가 되는 어머니를

오랜만에 꿈속에서 만났다 온갖 가재도구며

잡동사니를 내다 마당에서 태우신다

모두 껍질인 거라 살다보면 껍질에 둘러싸여

알맹이 하나 찾는데 껍질이 태산 같구나

이 놈의 태산을 또 태우는데 불의

껍질이 얼마나 기일게 연기를 피우는지

전생(前生)의 눈알까지 맵고 눈물의 껍질이 또 한 겹 벗겨진다

어머니가 열매로 맺은 껍질, 나는

또 한 겹의 꿈에 싸여 어머니의 꿈을

까먹었지만, 되돌아보면 늘 껍질로 기일게

늘어나 있는 길들이 어떤 열매의 속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 마지막 씨눈을 파먹고 날아오르는 하늘의

껍질인 새떼들

귤껍질 속의 바다가 쪼글쪼글하게 마른

방바닥에 앉아 보면, 태산이

상수리열매 하나를 감싸는 껍질로

날로 푸르러지고 있다는 것도

 

 

 

 

무거운 꽃밭                         

 

늦가을까지 남아 있는 화단의

장미꽃 몇 송이

저 가벼운 역사(力士)는

지금 얼굴이 붉게 물들도록.

땅을 들어올리고 있다


장미꽃 뿌리가

움켜쥐듯 뻗어간 흙들은......

저 가벼운 꽃의 향기에도

늘씬 들어올려진다

날아가 허공으로

장미의 가시에게로

모든 유혹이 이끌리기도 한다.


                           


 

미루나무  

 

바람 불어 길게 휘어지는 미루나무,

허리 아래까지 흔들리며

허공의 화선지 깊이 눌러 써대는 저 필력(筆力)


아무리 휘갈겨 써본들

아무리 파지를 낸들

하늘엔 기러기떼 지나간 흔적도 남지 않는다


태풍이 와 허리가 꺾이고

사철 붓을 쥔 흙의 손아귀힘이 빠질 때

초록에 단풍을 묻힌 것도 한 필법인가


죽은 미루나무 붓을 씻는 늦가을 저녁비,

초록의 붓털에서

쓰르라미 소리 쏟아지는 여름날이

삭정가지 붓털로 빠져 근심하던

까치는 다시 제 집에 꽂아 쓰자고 물어 올리고


마른 우듬지 위에 흰 눈이 묻어온다

허공에선 죽은 나무의 운필이 너무 고요하다

모자라진 미루나무 독필(禿筆)은 불쏘시개로 쪼개진 뒤

아궁이 속 불길로 휘갈겨지는 초서체(草書體)들


지붕에 꽂힌 필봉(筆鋒)에 연기의 필체가 흐리다


 

 

 

                            

발작     

 

누워 있는 몸,

천장엔 흐릿한 꽃밭

납작하게 눌려 있다


꽃밭을 일으켜 세우고

꽃밭가에서

미친 여자의 곱게 타는 눈

불을 바라보고 있겠다


일 밀리미터도 자라나지 않은

거꾸로 박힌 꽃밭을 위해

가만히 팔이 들린다


들린 팔에 달린 손,

손가락들, 파르르 떨린다 

뒤틀리듯 춤춘다


누워 있는 박수무당, 나는

겨울 꽃밭에 누워 있겠다

내 한끝을 달려가고 있는 당신!


 

 

 


 

 

              배암에 물린 흔적          

 

아, 소리지르자 나는 이미 물리고 말았다

너 세상의 길에게 발목이 물려

잠 속에서도 피흘리며 질질 끌려가다

끌고 가는 척 잠시도 오래 걸었다

때론 키 큰 떡갈나무의 여름이 나를 오래 물었고

금잔디 뒤집어 쓴 어머니의 무덤이 오래

내 꿈자리에 또아리를 틀고 가을 떠나지 않았다

창녀들, 꽃 없는 몸 하나로 천만년의 화대를 받으려

어린 몸에 겨울에도 눈꽃 수의를 입혀 새벽 거리로

화투장처럼 내몰았으니 내 물리면 물리는 대로

허물어져 겨우 잠에게 물려 코를 골았다

혼자 있는 밤, 펑펑 쏟아지는 눈발에 기억의 이마가

서늘히 물려 버리고, 미친 누이가 내뱉는 가당찮은 말들의

백서에 가슴이 졸려 따라 읽었다 나는 미치지 않았으니

잘못된 너희 세상이 나를 더 미치게 읽어라! 누이는

가만 있는 병과 사발을 깨고 십자가를 내던져

하느님이 나를 물러 수만 채 양떼구름으로 내 없는 문을

두드렸다 양떼에게 물리는 나, 온몸이 차가운 불로 한 그루

타오르는 푸른 나무로 뿌리는 나를 물었으나 이내

숯처럼 열매들이 나를 떨어져 나갔다

가만 있어봐, 아직 덜 물린 곳에서 생버섯이 자라오르고

길 끝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 그걸 따먹었다

네 죽음엔 아직 기름이 끼었다 저마다 미이라 속의 모래알들

사막의 뱀 하나를 몰아주었다 또 시작이다 끝은

그렇게 몰려와 한바탕 겨울로 나무들이 자랐다

한 번 물어봐야지 나도 그렇게 문밖을 나서는 순간

길 없는 길마저 허물을 벗고 혀를 낼름 거렸다

어디선가 붉은 부적 한 장이 날아와 내 이마에 붙었다

사라진다 근동의 빈 집 하나가 주저앉으면서 날아든

그 부적 하나가 나를 붙었다 간다

아, 외진 거리, 불구사 안의 부처님들 보며 성당 종소리를 듣고

주의 기도를 올리며 비둘기가 물찌똥을 싼다 개새끼들아

온통 흔적으로 적힌 나의 몸들, 빛이 자라오른다


 

 


부위     


밤벌레에 물린 팔뚝을

손으로 문질렀다 


벌겋게 도드라진 곳을

혀로 가만히 핥았다


어쩌면, 나도 내가 끔찍이 싫은 뱀인지 모른다

그저 허물이나 벗는


혀로 핥은 부위는

아무 맛이 없다


상처는 이미 깊은 맛을 본 곳이다

맛을 보고

그 맛에 죽은 기억이다


문밖에서 아무리 두드려도

들을 수 없는 상처,

더 큰 상처로 열어야만

그 처음을 맛볼 수 있다


 

 

 

사마귀와 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마당엔

당신이 붙들고 섰던 오랜 목련나무마저 잘렸다

햇빛이 푸짐해졌던 걸까 잘린 둥치 근처에

이듬해 비비추 잎사귀가 무성해지고

여름 허공에 꽃대를 밀어올리는 비비추

여린 속잎에 가만히 사마귀 새끼가 기어오른다

악수를 건네듯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나는

놈에게 벌써 추파(秋波)를 던지는 것이다 자기를 죽이고

숨을 죽이자 눈길은 이내 그윽해졌다 누구나

제 어미를 잡아먹고 크지 않은 새끼가 어딨겠는가

육식(肉食)의 탁월한 몸짓은

오늘도 내일도 그 너머 기일게 구불거리는

시간의 창자를 지구 몇 바퀴라도 감고 있으니,

내 어미 내가 잡아먹었고 그 어미 힘겨워 손 짚던

키 큰 목련나무 그늘이

오늘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애써

그 자리로 쏟아지는 햇살의 등골을 이고 나는

어린 사마귀와 수작을 부리며 마음을 어루나니

내 몫의 먹성도 누굴 또 먹여 살리는 自害의 아름다움!

그 그늘에 향기를 파는 꽃대를 부여잡고

사마귀 벌써부터 앞다리를 펼쳐 당랑권(螳螂拳)의

풀빛 사냥을 내게 드리우나니, 배고픈 놈들은

배고픈 놈들과 함께 제 어미를 불렀으나

그 어미 제 영혼의 뱃속에 들어찬 뼈와 살로

힘차게 죽어져 되살아나고 있으니, 사마귀야

대체 어미란 어미들은

이 땅에 잡아먹히려 울다 웃다 가는

눈물겨운 등신(等身)들이 아니었더냐, 갸웃 외고개를 틀며

어떤 향기로 죽음을 부를까 즐거이

고민하는 너와 나에게,


                            

 


선풍기       

 

다치지 않을 만큼 철망을 씌우고

그는 감옥에서 쳇바퀴를 돌고 있다

보이잖는 푸른 불꽃을 먹고

제가 생각하는 꽃으로 달려가고 있다

달려가도 달려가도 제자리인 곳,

그는 끝내 뜨거운 한숨을 토하고 있다

멍들지 않는 바람을 만드는

그의 등 뒤엔 무섭도록 고요한 공기가

그를 다스리고 있다

내가 진 온몸의 더위로 그의 감옥을 껴안아줄 때

내 얼굴의 땀 한 방울이

그의 쳇바퀴 속으로 떨어졌다

평생을 털어내도 몸에 쌓이는 먼지들,

겨울에도 그 먼지는

반투명 비닐 덮개에 곱게 싸여서

늦봄에 깨어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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