烏耳島...이 효숙
1
섬의 뿌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멀미를 겨워하던 이웃들은 하나씩 짐을 꾸렸다
비워낸 자궁처럼
더 이상 불빛이 보이지 않는 빈집의 문들은
어둠 속에서 저 혼자 펄럭이고
허기진 별들은 버려진 그물 더미를 갉아먹으며
궁색한 밤을 비워내고 있었다.
아무와도 약속하지 않았던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새벽의 근처에서 싸늘한 바다를 물어뜯던 까마귀떼.
죽음 몇 뿌리 헹궈내던 그 바다에서
양식(糧食)처럼 자라나는 굴들의 어린 살과
해초의 푸른 머리칼로 밥상 위를 가늠하던
아, 아 지그은 울부짖다 목이 쉰 침묵의 섬.
바다 위로 우우 몰려가며 가래 끓던 바람소리도
아주 가버리거나
절벽 아래서 검붉게 피멍든 채로 누워버렸는지
사방은 허물어진 소문과
플라스틱 문패 속에 버려진 이름들이 나뒹굴고
등지고 돌아누운 아버지의 잠 속에서
한 때 은빛 조기떼의 달아오른 깃발이 드날리는데
이제 제발로 떠난 뱃길로 다시 나아가지 않으리라.
2
문 닫은 횟집 앞에서
나는 흔들리는 세상과 술을 마신다.
잔 속에서 흐물거리는 낮달의 지느러미.
낡은 발동선이 햇볕에 바짝바짝 말라가는 풍경을 보며 볕나는 목젖에 조개국을 흘려넣으면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석유 냄새에
역하게 진저리를 친다.
바라보면 바다는 한 장의 푸른 손바닥.
가끔은 오이도(烏耳島)의 뺨을 치며 일깨우기도 했건만
도시의 불빛이 밀물 끝에 밀려오던 때
그 불빛을 등지고 떠난 어족의 날카로운 예감은
이웃들의 가벼워진 고향을 끌고
어디일까, 새 물살이 그리운 나라로 몰려가버리고
위태롭게 수평선의 외줄을 타고 오던 봄도
기다림 속에 남아 있지 않은데
이제 떠나야 할 땅에서
마지막 남아 있는 정직한 절망은
녹슨 닻에 걸려 풀잎 몇 줄기 쏟아놓는다.
3
들리는가.
깊은 잠의 언저리를 다가오며 흐느끼는 저 소리,
거센 폭풍이 바다를 휘감고
찌그러진 양은 대야가 낮은 지붕을 넘나들 대
나의 탯줄을 잘라주던 그날의 섬이
말라붙은 젖줄을 더듬으며 우는 소리가,
건넌방에서 귀없는 아버지가 짐을 챙겼다.
뒤척이는 선잠 속에서
묻어야 할 이웃들의 흰 뼈가 굴러다니고
베개 밑으로 밀려온 염전의 바닥을 긁어
나는 눈물만큼
한 움큼의 소금을 씹어보았다.
파래 속 같은 가슴을 지니고 남아 있던 몇몇 사람들과
새벽배에 오르면서
우린 내내 안개 속에 가물거리는 오이도를 바라보았다.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우리들의 끼니를 걱정하면서,
드문드문 보이는
기억 속의 겨울 이빨을 하니씩 뽑아내면서,
바다의 싱싱한 살점으로 퍼득이던 오이도여.
아버지의 젊은날의 왕국이여.
아득히 멀어지면서
나는 지도 속에 단단하게 굳어진
서해 바다의 눈물 한 점을 지우고 있었다.
언제고 먼저 찾아올 건강한 바닷새들의
나직한 둥우리를 위하여.
☞198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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