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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가 주목했던 삶의 문제들-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언어의 조각사 2011. 5. 20. 09:31

릴케가 주목했던 삶의 문제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발제/이종남

독일 현대시를 완성시킨 20세기 최고의 시인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10통의 편지를 통해 젊은 시절 빠질 수 있는 고민에 대해 그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해결책을 제시해 나간다. 예술, 성, 고독, 사랑, 신, 슬픔, 죽음, 회의 그리고 인간 존재 이유에 대해 차례로 그의 사고를 개진한다.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주목했던 점은 깊은 고독에의 침잠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이러한 태도는 작품을 통해 생애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데 삶과 죽음에 대한 희구와 함께 평생 화두가 된다. 그는 가벼운 것보다 어둡고 무거운 것을 향하는 진지함에서 참됨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의 고독은 시인으로서의 그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감성이자 하나의 개체로서의 인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바탕이기도 하다. 어떤 충고도 필요하지 않다는 그의 말과 달리 그는 늘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의 조언에 많은 사람들이 감흥을 받고 위로를 얻었다. 하여 여기에선 10통의 편지에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 중 예술, 사랑, 고독에 대한 태도에 대해 간략히 짚어보고자 한다.

1. 첫 번째 편지에 나타난 창작태도에 관하여

창조자는 자체가 하나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진정한 창조자에게는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보잘 것 없어 보이지 않으며 감흥을 주지 않는 장소란 없다고 그는 말한다.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 삶의 샘물이 솟아나는 깊은 곳을 살펴본 후 그 원천에 도달하여 반드시 창작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우선 진지하게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더 이상 누구에게 자신의 시를 평가받지 않아도 필연성에 의해 생겨났으므로 이미 시가 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예술에 대한 진지함을 나타내는 태도로 특히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들이 지녀야할 태도로 보인다.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과연 우리는 그 만큼의 진지함과 창작에 대한 고민을 지녔는가?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성의 배설 차원으로 가벼운 시인이 되어 문단을 오염시키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깊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말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그것이 어디로부터 생겨났느냐는 그 생성의 뿌리에 있다는 그의 견해에 대해 아무런 반론을 제시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과연 예술, 특히 시의 존재 이유가 탐구된 후에 완성된 소비자적 입장의 결과론으로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고 본다. 그의 말대로 창작자에게 있어서 이미 자체가 하나의 세계가 되어있다면 따로 시로서 세계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또 샘물이 솟아나는 곳을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감흥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생긴다면, 그 욕구 분출이 창작의 이유가 된다면, 타인에게 가볍게 보이는 작품이라도 창작자 당사자에게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과정일 수도 있으므로 창작 그 자체가 충분히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고민과 철저한 고독 없이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는 말에는 의견을 달리 할 수 없다. 그러나 진지한 고민 후에도 그 내면을 표현해 내는데 있어서의 능력 또한 좋은 시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되므로 진지함과 표현 능력을 따로 생각할 수도 있다고 본다. 즉 시로서의 명성이나 완성도를 떠나 시세계를 추구하는 창작자로서의 행복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완장을 즐기는 부류들의 표피적인 창작태도까지 편 들어주고 싶지는 않다. 다만 시가 완성도와 명성이 높은 시로서만 존재가치가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고 본다. 창작 자체로 모든 만물을 기꺼이 깊고 아름답게 받아들인다면, 그로 해 한 사람의 생이 풍요롭다면 그 자체가 시이므로 시와 기타 다른 것들을 굳이 따로 구분할 명분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시를 특히 성역화 시킬 필요도 없다. 따라서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글이 아니면 죽음을 택할 정도의 강력한 욕구가 아니더라도 창작을 창작 자체로 즐기는 것도 의미가 크다고 본다. 그리고 주변의 인정 없이는 시로서의 기능을 살리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할 때 이 문제에 대해서도 논해볼 가치가 있다. 결국 시도 많은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 살아남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1. 반드시 목숨을 걸 만큼의 욕구가 있어야만 시를 쓸 수 있는가?

2. 비평의 말은 언제나 다행스런 오해로 귀결되는가?

2. 여러 편지에서 거론한 고독에 관하여

고독과 인생, 이 필연적인 관계에 대해 릴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정의한다.

‘고독한 개인만이 하나의 사물처럼 심오한 법칙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 말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심오한 법칙을 찾아 방황하는 것이 생이라면 이처럼 명료한 답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고독이 심오한 법칙을 알려주는가? 심오한 법칙과 고독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멀고도 궁극적인 가치에 대한 답이 결국은 신이기 때문이다(무신론자는 다르겠지만).

릴케는 신 앞에 상대적으로 더 하찮은 것이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이 세상에 하찮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확실성,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찾는 심오한 법칙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심오한 법칙을 알려주는 고독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는 고독을 ‘고유성을 지키려는 저항’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완벽한 신이 있다면 신의 존재 이후의 우리의 존재 의미는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는 한 신 이상의 우리가 추구하는 완벽한 존재는 없다는 얘기다. 여기서 완벽한 고유성에 대한 고민이 생기는데 그것이 곧 고독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고유성을 지키려는 저항 때문에 우리는 고독을 느끼게 된다. 때론 우주공간에 내동댕이 처져 산산조각으로 터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그에 따라 모든 거리감과 척도가 변하게 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자신을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넓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발휘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작 그 고독을 통해 우리가 자연의 한 개체로 함께 존재함을 체감하게 된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다. 고독 속에 깊이 있을 때 오히려 고독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된다는 점은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독감 때문에 쩔쩔매고 있는가. 여기서 릴케의 조언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고독을 두려워 마라. 그것을 시끌벅적한 밖으로 끌고나가 해결하려 들지 말아라. 고요히 내면으로 침잠해 자신과 대면하라. 그러면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리 비껴가는 어둠에 잠기기 시작한 집과 같이 될 것이다.’

그 빈 집에서 우리는 온전히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실상 삶에 있어서의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최선을 다해 순간을 완성하면 그 뿐이다.

시인들이여! 고독하라. 그 고독의 방으로 삼라만상을 끌여들여 그 방 안의 한 존재로 존재하라. 그리하면 작고 사소한 것들의 위대함이 보이리라.

1. 고독의 정체는 과연 고유성을 지키기 위한 저항에서 오는가?

2. 고독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3. 사랑에 관하여

모든 사랑의 도착지는 곧 사랑이다. 말이 되는가? 이는 곧 사랑에 있어서 자기를 완성해나가는 이유 외 다른 명분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이성, 혹은 혈육, 이웃 간의 사랑도 결국은 인간애로 귀결되고 그 인간애를 실천 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성숙된 사람이다. 이 책에서 릴케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랑은 융합이나 헌신, 그리고 상대방과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개인이 성숙하기 위한, 자기 안에서 무엇이 되기 위한,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한, 상대방을 위해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한 숭고한 동기가 될 뿐이다.’

당연한 말이다. 헌신적이고 희생적이고 하나가 되고 등등의 사랑으로 사랑을 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유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 또한 온전히 홀로서기 위한 연습이며, 과정이며, 성취다. 그러나 소유욕을 배제한 사랑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여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위대하고도 가혹한 요구가 있다.

우리는 한 개인을 지목하여 그에게 원대한 사명을 부여하는 그 무엇인 사랑을 실현할 능력이 없다. 고로 인간의 사랑이란 지리멸렬하게 순간에서 멈추고, 시도도 못해보고 끝나는가 하면 영원한 이상으로만 남게 된다. 하여 우리들이 기껏 하는 사랑이란 쉽고, 값싸고, 위험 없고, 그래서 안전한 곳으로 인습을 찾아 기어들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사랑의 정의, 내지는 목표가 그러할진대 무모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사랑을 시도나 해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세상은 이상대로만 살아지지도 않고, 살 수도 없을뿐더러 이상대로만 살 뚜렷한 명분도 없다. 그리고 사랑의 시작점에는 분명 자신이 위대한 사랑을 성취할 것만 같은 착각의 강이 있어 기꺼이 그 강 앞에 서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을 미리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가다 그치더라도, 미성숙하더라도, 소유욕에 머물더라도 사랑은 지속되어야 한다. 다만 온전한 한 인간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돕는다는 궁극적인 목표만은 잊지 말아야 하리라.

릴케가 평생을 통해 수도자적 삶을 추구하는 사랑론을 펼쳤지만 그조차 몇 번의 사랑을 거쳤다는 것만으로도 온전한 이상적 사랑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체험에서 우러났을 그의 사랑에 대한 사유는 사랑에 관한 환상을 지닌 많은 젊은이들에게, 또는 기성인들에게 사랑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아직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힘들고, 그래서 가치 있는 진정한 사랑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비록 그곳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세상은 살만하다. 사랑을 향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1. 소유욕을 배제한 사랑이 과연 존재하는가?

2. 인습(윤리, 도덕, 규범)안에서의 사랑만이 가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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