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시인의 참 시詩 방앗간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10회]-연필을 깎다가

언어의 조각사 2024. 4. 7. 07:26

어둠도 두렵지 않았던 부모님의 든든한 품안에서

 

[골프타임즈=김영미 시인]

나는 지금도 만년필과 볼펜보다는 연필로 글쓰기를 즐긴다. 그리고 종이에서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로 내 존재의 마중물인 아버지를 만난다.

다정다감한 부모님 덕에 어린 시절의 밤은 어둡지만은  않았다. 등잔불과 반딧불 그리고 달빛과 별빛만으로도 빛나는 추억이 많기 때문이다.

시골 마을 외딴집에 저물녘이면 구석구석 어둠이 깃들었지만, 다정한 어머니와 든든한 아버지의 울타리 안에서, 그 어둠들은 동화 속 도깨비나 호랑이보다도 두렵지 않았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동생들 돌보느라 바쁜 어머니와 함께 숙제와 준비물을 챙기시며, 채굴 막장 노동으로 불거진 손으로 연필을 깍아주시던 아버지.

곱고 매끈하게 깎이는 연필을 바라보던 나는, 꿈나라에서 책가방 속 필통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뾰족한 연필들을 만났다.

가난해도 빈곤을 모르고 꿈을 펼칠 수 있던 건 아낌없는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의 힘이었음을...
아버지가 깎아주시던 뾰족한 연필을 생각하며, 오늘도 간절한 그리움으로 부재 중 편지를 써 보낸다.

 

 

연필을 깎다가/ 김영미

 

집안의 저문 일들은 아버지 몫이었다
안방의 불빛이 먼저 뛰쳐나왔고
첫째의 호기심 어린 눈길에 그어진
성냥개비 하나가 마루의 유리 등잔을 깨우고야
밤의 첫 관습이 열리곤 했다

 

구석구석 허기진 어둠들이
등잔 가까이 고개를 디밀었지만
곧 내 졸음의 뒤란으로 밀려나는
그 깊고 푸른 지상의 날들 속에서
세월의 남루한 그늘을 밝히던 아버지는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등불이었다

 

어쩌면 내 지문에 갇힌 햇살의 파편들은
막장 속에서 태양을 등지고 살아온
아버지 삶의 역광일지 모른다

 

저녁이면 묵묵한 사랑으로 깎아
가지런히 필통에 넣어주던
그 단단함 속 푸른 연필심은
내 삶의 모퉁이마다
연둣빛 방점이 되어주곤 했다

 

오늘도 오래전 향나무 연필을 만난다
아버지의 칼끝이 찾아내던
따듯한 우리들의 하루와
녹슨 등잔불 밑의 가족사

 

나는 조용히 기억의 한편에서
연필 하나 꺼내어
주소 불명의 아버지께 편지를 쓴다

 

▼ 골프타임즈 가는 길

 

골프타임즈 모바일 사이트, [김영미의 참 시詩 방앗간 10회] 연필을 깎다가 (thegolftimes.co.kr)

 

삽화: 박소향

[평론]

시인은 삼라만상에게
생명과 영혼을 불어 넣어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깎아서 필통에 가지런히 넣어준 연필에도 영혼을 불어넣어서 시심이 살게 한 거다. 

시창작에서 비유의 가장 기본적인 의인법이 시작된 건데
'안방의 불빛'
'성냥개비 하나'에도
무척 고급진 의인법이 작동된 거다.
아버지의 지극한 딸 아이에 대한 사랑이 수십 년을 뛰어 넘어 오늘까지 이어지니
ㅡ녹슨 등잔불 밑의 가족사
한 편을 가슴 멍먹케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2024.04.12

- 우병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