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꽃
최광임
넓은 냄비에 카레를 끓인다
불꽃의 정점에서 꽃이 핀다
굴참나무 아래 쪽빛 드는 구릉 사이
타닥타닥 산수유꽃 피어나듯
약한 불꽃 가장자리에서부터 오르는 기포
철판도 더 뜨거운 한 쪽이 있다니,
나도 그대 앞에선 뜨거운 꽃이지 않던가
세상은 자꾸 배면을 더 할애하지만
억척스레 빛을 끌어다 덮고 열리는 몸
불판 중앙으로 냄비의 위치를 바꿔놓는다
한동안 노란 속살까지 차오르는 뜨거움
누구의 한때도 뜨겁지 않는 삶은 없다
봄날의 빛이 또 산란한다
유독 내 가슴이 먼저 가 닿는 곳
까르르르르
산수유꽃같이 끓어오르는
나를 저어다오
전북 부안 출생
2002년 《시문학》 등단
1987년 진주개천예술제 연극부문 최우수 연출상 수상
시집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도요새 요리』
물의 집
-최광임
사랑은 전신을 훑고 지나는 소주 한 잔의 떨림으로 온다
도도한 강물로 굽이쳐 포구에 몸 푸는 물과 같이
첫 잔을 기울일 때 목젓을 적시며 물길 굽이굽이
몸 가장 아래에서 번지는 짜릿함이다
술 마시며 취할 것을 미리 염려하지 않는 것과 같이
사랑보다 이별 뒤를 염려하는 이는 드물다, 다만
첫 잔을 꺾어 마시듯 사랑하기에 주저하는 것은
술은 잔이 넘치도록 따를 수 없는 법이어서
언제나 2할이 부족한 잔의 속성을 알기 때문이다
나를 다 비워 누군가를 채워본 사람은 안다
누군가가 나를 다 채워주기를 기다린 사람은 안다
언제나 2할의 차가운 알몸을 드러낸 채 흔들리는 불
마치 내 늑골 어디쯤을 드나드는 허허로운 바람 같은
사랑이 올 때도 사랑이 지나갈 때도 아닌
누군가와 사랑하고 있을 때, 안다 우리는
먼 강을 굽이쳐 흘러온 말랑말랑한 물의 집
얼마나 간절히 만조의 바다를 꿈
꾸는지
목련꽃 진다
최광임
아름다운 것이 서러운 것인 줄 봄밤에 안다
미루나무 꼭대기의 까치둥지
흔들어 대던 낮바람을 기억한다
위로 솟거나 아래로 고꾸라지지만 않을 뿐
바이킹처럼 완급하게 흔들리던 둥지
그것이 의지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이라고
의지 밖에서 흔들어대는 너
내 몸에 피어나던 목련꽃잎 뚝뚝 뜯어내며
기어이 바람으로 남을 채비를 한다
너는 언제나 취중에 있고
너는 언제나 상처에 열을 지피는 내 종기다
한때 이 밤, 꽃이 벙그는 소리에도 사랑을 하고
꽃이 지는 소리에도 사랑을 했었다
서러울 것도 없는 젊음의 맨몸이 서러웠고
간간히 구멍난 콘돔처럼 불안해서 더욱 사랑했다
목련나무는 잎을 밀어 올리며 꽃의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일까
이 밤도 둥지는 여전히 위태롭고
더욱 슬퍼서 찬란한 밤 또 어디서
꽃잎 벙그는 소리 스르르,
붉은 낙관처럼
너는 또 종기에 근을 박고 바람으로 불어간다
꽃 진다, 내가 한 고비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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