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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유리의 존재

언어의 조각사 2017. 8. 16. 22:17

                 

  

김행숙/ 유리의 존재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

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유리창에서 손바닥을 떼면서…… 생각했다.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검은 눈동자처럼 맑게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았을까.

유리는 어떤 경우에도 표정을 짓지 않는다.

유리에 남은 손자국은 유리의 것이 아니다.

   

유리에 남은 흐릿한 입김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제발 내게 돌을 던져 줘. 안 그러면 내가 돌을 던지고 말 거야.

나는 곧, 곧,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오늘에야 비로소 나는 죽음처럼 항상 껴입고 있는 유리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믿을 수 없이, 유리를 통과하여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밖에 네가 서 있었다.

그러나 네가 햇빛처럼 비치면 언제나 창밖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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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행숙시인의 ‘유리의 존재’를 읽으면서 좋은 시를 만난 반가움과 함께 시 쓰는 사람으로서의 부러움을 고백한다.

하여 이렇게 좋은 시를 만나면 나는 시적한계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자괴감에 시달리곤 한다.

이 시는 ‘유리’라는 대상을 통해 타자와 접속하려는 감각적 인식을 형상화한 시적 발화기법이 탁월하다.

현실 세계에서의 벽, 즉 유리를 통해 화자의 억압된 감정을 유리에 비친 자신과 타자를 동시에 일치시킴으로서

교차되는 감정의 흐름을 하나로 호흡하려는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유리라는 존재의 맑고 투명함속에 내제된 불통, 즉 개인주의적 사고로 인한 이기심과 폭력성 또는 분노와 아픔을

유리를 통해 서로 바라보는 공공선상에서 유리처럼 투명한 듯 보이나 근접하지 못하는 소통과 공감의 부재를 인식하고 그것의 깨고 싶은 화자의 고뇌가 절실하다.

햇빛은 벽을 통과해서 화자를 비추고 있는데 자신은 유리벽 밖의 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는 절망감으로 환상적 미완의 의식세계는 깨지고 피를 흘린다.

종장에서 화자는 또다시 현실세계에서 유리벽 앞에 맞닥뜨린 자신을 본다.

유리를 통과한 햇빛은 따듯하여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여전히 불통의 벽 앞에서 슬프고 막막한 고독을 느낀다.

시각과 촉각의 언어적 표현으로 이미지를 상승시키는 의미시로서 그 묘미가 짜릿하다.


2017년 8월 15일

진정한 해방을 꿈꾸는, 心田김영미


 

 kimhs.jpg

 1970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9년 《현대문학》등단
시집 『 사춘기』』『이별의 능력』『타인의 의미』『에코의 초상』


수상소감-
작년 여름은 추웠는데, 올해 여름은 숨이 막히게 더웠습니다. 작년 여름에는 유리창에 성에가 끼고 시야를 지우며 멀리서 눈이 내렸습니다.
이상한 계절에 갇혀 있었습니다.
시는 멀리 소실점 속으로 물러갔다가 문득 이 이상한 계절의 유리창을 깨뜨리듯이 찾아왔습니다.
시로부터 잊히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감사했는데...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뜨거운 여름 햇빛이 아직 남아 있었던 어느 날, 수상 소식은 새의 부리처럼 날아들었습니다. 
제 안의 무언가를 쪼아 댔습니다.

새의 부리 같은
눈비 같은
아침 이슬을 미세하게 흔드는 가장 약한 바람 같은
이웃의 눈물 같은
이방인의 길을 잃은 눈빛 같은
외국어 같은
밤하늘의 칠흑을 찢는 번개 같은
붉은 사이렌 같은
얼음을 쪼개는 도끼 같은
발바닥을 태우는 불꽃 같은
시끄러운 광장에서 엄마 손을 놓친 아이의 손 같은
유리창을 향해 긴 포물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돌멩이 같은

....그런 외부가 없었다면, 어떻게 시가 깨어났을까요? 그런 바깥이 없었다면, 어떻게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유리의 존재-2016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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