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튀데모스를 읽다.
김영미
플라톤이 저술한 [에우튀데모스]는 플라톤이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테스들의 궤변을 다르는 대화편이다.
플라톤은 독자들에게 해학과 풍자적 희극의 형식으로 시작함으로써 그들의 궤변으로부터 충분한 심리적 거리를 확보하게 하고 있다.
젊은 플라톤이 당시에 위세 당당하던 소피스테스들과 소크라테스와의 차이점을 해명하면서 소피스테스들이 제기한 도전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소크라테스 철학의 연장선상에서 해명하려는 기획의 초안이 담긴 철학서이다.
전통적인 지혜와 절제, 용기, 정의 등은 타고나는 것이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덕에 관해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덕이 훌륭함이 되어야 한’고 했고, 소피스테스들은 ‘덕은 남보다 뛰어남이요 탁월함’이라고 한다.
이는 소피스테스들의 “쟁론술”과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의 대립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테스들에 대해서는 과장된 칭송의 언행으로 그들을 풍자하는 반면, 덕으로 이끌 대상인 클레이니아스에게는 대단히 온유하고 자상한 태도로 대한다.
이 책에서의 대화 내용 중에서는 소크라 테스를 끊임없이 장난과 진지함 사이를 오가면서 농담과 진담을 뒤섞으면서 대화를 이끌어가는 희극의 주인공으로 표현되어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주석을 참고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다소 난해하기도 하였지만,
애매어나 수식어를 이용한 주장과 논변을 펼치며 나아가는 박진감 있는 그들의 대화에 차츰 매료되어가고 있었다.
당시 저명한 철학자인 프로타고라스와도 당당히 논쟁을 했던 패기 있는 청년 소크라테스도 여기서는 노년의 원숙미와 여유로움을 보여준다.
쉼 없이 이어지는 논리와 논쟁을 익살스럽고 재미있게 전하고자 했던 소크라테스의 메시지가 깃든 철학서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래와 같이 시작된다.
크리톤 : 소크라테스, 어제 자네가 뤼케이온에서 대화를 나눈 사람은 누구였나? 정말 많은 무리가 자네들 일행을 둘러싸고 있는 통에 듣고 싶은 마음에 다가갔지만 나는 무엇 하나 똑똑하게 들을 수가 없었네(p31)
-이 장면은 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즐겼으리라는 당시의 토론 문화를 엿볼 수가 있었다.
부자친구 크리톤이 소크라테스가 논쟁하던 모습을 보고 연유를 묻자, 소크라테스는 미소년 클레이니아스와 그를 사랑하는 크테십포스와 함께 있었으며, 자칭 지혜의 소유자이자 스승을 자처하던 소피스테스 형제 디오뉘소도로스, 에우튀데모스와 논쟁을 벌였다고 말한다.
소피스테스들은 그들 특유의 말장난 같은 논쟁과 궤변으로 끝까지 일관했고,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논리전개의 허점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능청스러운 연기를 하면서 대화의 묘미인 논증과 논변으로 그들과의 논쟁을 이어나간다.
"클레이니아스, 배우는 사람들은 어느 쪽 사람들인가? 지혜로운 사람들인가 무지한 사람들인가?"(p39)
-클레이니아스가 지혜로운 자가 배운다고 하자 에우튀데모스는 지혜로운 자는 알고 있는 사람을 말할 테고 알고 있는 사람은 배움이 필요 없으니, 결국 무지한 자가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숨도 돌리기 전에 디오뉘소도로스가 클레이니아스에게 선생들이 가르치는 말 중에 모르는 글자가 있는지 묻고, 클레이니아스가 알고 있다고 하자 디오뉘소도로스는 그들을 알고 있으니 지혜로운 자이고, 클레이니아스는 “지혜로운 자가 배우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여기에서 에우튀데모스는 “배우는 사람은 아는 것을 배우는지 알지 못하는 것을 배우는지”를 묻고, “알지 못하는 것을 배운다”고 말한 클레니아스를 “글자를 아는 사람이 글 전문가가 불러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하여 논박한다.
디오뉘소도로스는 “배우는 것이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인가?”를 묻고, 이를 긍정하는 클레이니아스를 ‘그렇다면 배우는 쪽은 무지한 쪽에 속 한다’고 논박한다.
이는 애매어를 이용한 논변이라고 한다. ‘배우다(manthanein)’이라는 그리스어에 ‘지혜/무지’라는 쌍개념을 엮어서 만든 논변이라고 한다.
“글자를 아는 것은 글을 아는 것이다.”란 취지의 논변도 그리스어 ‘gramma’rk ‘글자’와 ‘글’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진 애매어에 기인한다고 한다.
플라톤은 모순과 반대의 구별이 중요하다고 역설한 철학자이다.
철학자는 무지자도 지혜로운 자도 아닌 그 중간자라고 본 것이다. 반면에 소피스테스의 쟁론술은 이런 반대자를 모순자로 파악했다.
소크라테스가 말과 괴변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클레이니아스를 가까스로 구하고는 그들에게 클레이니아스를 지혜롭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부탁한다.
그들은 클레이니아스가 지금 무지한 상태에 있으므로 지혜로운 상태로 가는 것은 클레이니아스가 아닌 상태, 즉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소 허황된 듯 보이지만 진지하고 진솔한 논변과 논박은 살아가면서 부딛기는 수많은 논제들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언어의 논리는 계속 이어지고 결국 소크라테스가 그들의 고약한 능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논쟁은 귀결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회인으로서 겪는 논쟁이나 변론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더 중요한 메시지가 이 책속에 숨어있다.
크테십포스가 소피스테스에게 배운 식으로 소피스테스들을 통쾌하게 논박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레이니아스가 아주 기뻐하며 웃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를 나무란다.
"클레이니아스, 왜 자네는 이렇게 진지하고 아름다운 일(것)들을 두고 웃나?"(p89)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이 진드기처럼 느낄 만큼 질문에 질문으로 이어가며 쉼 없이 말, 즉 철학적 진리를 추구한다.
그의 그런 자세는 운명을 넘어 숙명으로 느낄 만큼 소중했으리라.
터무니없는 논리로 일관하며 때론 허무맹랑한 논쟁일지라도 진리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기고 진지하게 임한다.
그런 그에게 클레이니아스의 어린자세는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태도였다.
소크라테스의 확고한 의지는 대화편의 마지막에도 드러난다.
“그러니 크리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말고 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쓸모 있든 쓸모없든 상관하지 말게. 사물 자체를 훌륭하게 잘 검토해서 그것이 자네에게 분명히 하찮아 보인다면 자네 아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것에서 돌아서게 하게. 만약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으로 보인다면, 속담마따나 그것을 ‘자네 자신과 자식들이’용감하게 탐구하고 연마하게.”(p101)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에게 논쟁의 연유에 대해서 모두 전하자, 크리톤은 한 연설문 작성자 (소크라테스)가 논쟁을 지켜본 후에 "헛소리나 하고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것에 쓸데없는 공을 들이는" 말들로 폄하했다고 전한다.
소크라테스는 진지하게 철학이나 정치에 몸을 던지지 않고 바깥에서 품평이나 하는 것은 "위험과 경쟁의 밖에서 지혜의 결실"을 즐기는 비겁한 태도라고 말하며, 그들의 말은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둘 다보다 못하고 사실상 세 번째면서도 첫 번째인 것으로 보이려 애쓰는 것"이라는 역설이다.
그런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토론자들에게 화내기보다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며, "분별에 관련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말하고 용기 있게 나서서 싸우며 공들이는 사람은 그게 누가 되었던 그 모든 사람을 아껴야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에게 논쟁의 질은 중요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에게 모든 논쟁은 진리 탐구를 향한 과정이었으며, 그 과정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현명한 철학자였다.
그에게 디오뉘소도로스, 에우튀데모스, 두 형제 소피스테스는 그의 철학을 펼쳐서 완성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준 기폭제와 같은 사람이었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나에게 삶의 지침서를 열어주었다.
플라톤의 ⌜에우튀데모스⌟를 통해 소크라테스의 논리 속 철학을,
끊임없이 던져지는 논제를 풀어가던 그들의 수려한 변론들과 함께 여행할 수 있었던 소크라테스와의 행복한 동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