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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시인

언어의 조각사 2012. 8. 13. 09:37

유리의 존재/ 김행숙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비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유리창에서 손바닥을 떼면서…생각했다.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검은 눈동자처럼 맑게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유리는 어떤 경우에도 표정을 짓지 않는다. 유리에 남은 손자국은 유리의 것이 아니다.

유리에 남은 흐릿한 입김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제발 내게 돌을 던져줘. 안 그러면 내가 돌을 던지고 말 거야. 나는 곧, 곧,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죽음처럼 항상 껴입고 있는 유리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믿을 수 없이, 유리를 통과하여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밖에 네가 서 있었다. 그러나 네가 햇빛처럼 비치면 언제나 창밖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

 

 

사라진 계단

나는 뱀을 빌어 고백하겠다. 나는 뱀의 성질이 아니라 뱀의 모양을 빌릴 수 있다.
뱀이 당신을 감아 오르고 있다. 느낌이 좋다. 뱀에 대해 말한다면 당신은 계단이다.
모양은 뱀이 계단이지만 뱀을 밟고 올라갈 생각을 할 사람은 없다.
나는 잠시, 뱀을 빌렸다. 그리고 오후 세 시 이후부터 걸어다녔다.



그가 홀연 두꺼워졌다

턱을 약간 치켜든 채, 그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마주앉아 있었지만 그의 바깥만 편안해서 바깥만 보았고 다문 입과 벌린 입 사이에 일어난 변화를 알 수 없었다. 그의 바깥에서
딸랑, 종이 울리고 한 쌍의 남녀가 들어왔다. 여자가 긴 머리채를 흔들자 눈이 떨어졌다. 까페 바깥에 내리는 눈이 아주 조금 까페에서 녹고, 테이블 위의 촛불들은 아무도 장난치지 않는데 깜짝깜짝 놀랜다.
어쩌면 사람들은 모두 입을 뻐끔거리며 바람을 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바깥만 보았을 뿐, 그가 본 것을 알지 못한다. 내 등뒤에서 갑자기 불이 났을지도, 불 속에서 기어나오는 아이의 눈빛과 마주쳤을지도, 불붙은 팔에 달린 손이 그를 향해 오그라들고 있었는지도,
혹시, 죽어가는 거지가 뿌연 유리창에 이마를 뭉개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거지의 붉고 더러운 이마만 투명했을지도 모른다. 벌어진 그의 입모양이 그가 붙잡힌 세계를 축소해 보여주었으므로, 어떤 음성도 새어나오지 않는
심연을 드러내었으므로 그는 도드라졌다. 그는 여기를 조금 튀어나갔지만 우리는 모두 바람을 불고 있는 사람일지도,



기우는 사람

그는 천천히 기울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무의식을 의심한다.
그는 내 계산대로라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범상한 은행나무에 50초 후면 머리가 닿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무의식을 의심한다.
여기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흙먼지가 곱게 일어나서 꺼풀을 조금씩 뜯어가는 운동장. 흙먼지 속에서 한 아이가 달리고 공이 붕, 공중으로 떠오른다.
나는 그의 무의식을 의심한다. 그러니까, 그는 어디를 경과하는 중일까?



대청소의 날들

가루비누 같은 눈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죠. 그런데 정말 오늘은 가루비누, 칠 일을 내릴 듯이 내렸어요. 사람들의 입술에서 비눗물이 흘렀구요. 거품을 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니까요.
검은 동자는 핏물에 빠져 있어요. 오늘은 어쩌면 눈물로 뭔가를 씻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모두들 눈을 감길 무서워해요. 오늘은 분명 異變이어서 결심하기가 매우 두렵지요.
배를 쥐고 구역질 하는 사람들 때문에 골목이 마구 꿈틀거렸어요. 멀리 있는 강이나 바다를 생각해 봤지만 가루비누, 참 아득하게 내렸죠. 우리가 순수에 대해 생각했어야 했을까요? 우리는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어요.
가루비누, 칠 일을 내릴 듯이 퍼붓고 군인들이 마침내 물청소를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얌전했지요. 그런데 더러운 강아지들이 사라지고 우리가 이윽고 발가벗은 기분이 들면, 거지와 집에서 아침저녁으로 세수하는 사람들을 구별할 수 없으면,
그때는 실종된 사람들로 보일까요? 우린 점점 유리처럼 투명해졌어요.


번개에 대해

고백건대, 내게서 뚝 떨어진 곳에서 떨어지는 번개를 맞아본 적이 없다. 그러니 번개에 대해
번개 양편의 구름에 대해 나는 올려다보는 자이다. 이때 내가 맞은 비의 굵기에 대해
잘 말할 수 없다. 나는 편향된 자이기 때문이다. 번개에 대해
뚝 떨어진 곳에서 정전이 되기도 하지만 구름은 다치지 않는다. 구름은 구름의 규칙이 있다.
나는 번개에 대해 수정하지 않는다.



출몰하는 길

나는 여러 곳에서 같은 길을 걸었다. 이 길은 잠시 주차해놓은 자동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러 곳에서 같은 남자와 마주쳤다.
나는 이 길을 쫓아왔다. 나는 몇 번이나 같은 남자에게 인사할 뻔했다. 그때마다 노란 가래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때마다 이 길은 자동차처럼 연기를 날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딸려간 가로수가 떨어뜨린 나뭇잎들은 벌써 뭉개지고 있었다. 사람이 아주 많은 도시였다.
이 길이 사라지면 도시는 처음 와 본 도시였다. 친척이 없는 도시였기 때문에 나는 여관에서 잠을 잤다. 길을 잃은 느낌이 없다는 게 이상했다. 걸어다니고 싶지 않았다.
길에서 凍死하는 사람들의 기분에 대해 생각했다. 이 길이 또 자동차처럼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다. 나는 이 소리를 너무 자주 듣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사춘기 3

그가 사라지자 바람이 사라졌다. 아이들은 그를 바람의 아들이라 불렀다. 어른들은 후레자식이라고 말했다. 돌멩이가 구르지 않았다.
바람이 사라지자 그는 침을 뱉고 사라졌다. 구름의 모양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름은 더 이상 좋은 공상의 재료가 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냄새를 풍겼다. 저녁마다 갈비를 뜯었다.
사람들은 도움 없이 책장을 넘겼다. 바람과 함께 그가 사라지자, 몇몇 애들은 정말로 책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책에서만 폭풍이 일고 운명이 일어서는 것 같았다.




- 사춘기 4

소년이 손을 열어 보여준 건 칼이었다. 분홍색 손바닥 위로 슬몃 피가 비쳤다. "연필이나 깎지 그러니?" 소녀는 분명히
비웃었다. 소녀는 뚫어지게 소년을 응시했다.
여자애에게 위로를 받아본 일이 있었던가? 생각나지 않는다.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는 여자애가 무서웠다. 소년은 소녀의 집에 놀러가보지 못했다. 소년도 소녀를 초대한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해수욕장의 모래밭에 누워있는 소녀와,
볼록한 가슴에 얹어주는 뜨거운 모래에 대해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생일파티 같은 것은 부유한 초등학생들이나 하는 것이다. "아무한테나 손을 벌리진 않겠지?" 소녀는 똑똑하다.
소년은 히, 웃으며 천천히 손을 오므렸다. 손가락과 함께 칼이 사라져갔다.



그녀의 눈

그녀가 빨간 눈을 하고 있으니까. 엄만 많이 울어서 그래요 엄만 나만 보면 울어요 그녀가 빨간 눈을 하고 있으니까. 그녀를 통과해 세상을 보면 정말 어리둥절해 2분마다 장애인이 생기지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지 검은 연기에 휩싸인 아이가 킥킥킥 노인 소리를 내네 그녀가 빨간 눈을 하고 있으니까.
지하에서 불쑥 불쑥 기둥이 치솟고 머리 위로 덤프트럭이 지나간다 눈에 박힌 걸 뺄 수가 없어요 너무 빽빽이 들어찼어요 몇 시간이면 수십 톤의 쓰레기가 쌓이죠 눈을 빼서 빗물에 꼭, 던져 버리겠어요. 그녀가 빨간 눈을 하고 있으니까.
엄만 나만 보면 울어요 그녀가 빨간 눈을 하고 있으니까. 밤이 와도 보이는 게 너무 많지 그녀 때문에 나도 쉴 수가 없어 제발 그녀를 좀 치워 줘 반질반질해진 눈알을 툭, 걷어차니까. 데굴데굴 110채의 아파트가 구르고 덤프트럭이 구르고 식당이 구르고...... 그 와중에 미소를 지으며 잠을 자고...... 껌을 씹으며 운전을 하고...... 후루룩



숨은 꽃

그는 지금 며칠 전에 꾼 꿈을 씨를 뱉듯이 얘기한다. 그는 며칠 동안 입 속에서 꿈을 암송하고 다녔다. 그는 숨기고 싶지 않지만
처음으로 입 밖에 나온 그의 꿈은 입 속에서 구를 때와 다르게 뒤척였다. 나는 내가 그의 입 속에서 굴러다닐 때가 더 좋았다고 말했다.
입 속의 기억이나 꿈 속의 기억은 내 꺼야. 그가 나를 꿈 밖으로 밀쳤다. 나는 꿈 밖에서 그의 꿈을 기록하는 관계로
그와 마주앉았지만 내가 얼마나 자주 그의 꿈 속으로 숨었는지 그는 알 수 없다. 그는 숨기고 싶지 않지만
나는 정말 숨었는 걸요. 꿈이 씨가 되기도 하지만 씨가 뭔가를 보여주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려요.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오래 꿈을 기억하지 못하죠.



당신의 악몽 1

여긴 전에 와 본 적이 있다. 나의 浮上을 두려워하는 자의 숨소리를 듣는다. 여긴 햇빛이 따갑군요.
그리고 당신의 머리는 浮沈을 반복하는군요. 당신의 음성이 곧 당신을 놀래킬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딴 사람 같습니다. 당신의 목젖에 걸린 피라미가 반짝, 몸을 뒤채는군요.
나는 거대한 여자다. 인간적인 차원의 부피가 아니다. 나는 거의 물이다. 내게 기댄다면 나는 잠시 튜브다.
당신의 벌어진 입에서 따뜻한 물이 흘러나오는군요. 은빛 호수 가운데 나는 떠오른 여자다. 그러므로 여긴 전에 와 본 적이 있다.



당신의 악몽 2

아침마다 틀니를 끼우고 저녁마다 해가 지지 않는 동쪽 호숫가에서 틀니를 씻지.
이빨 없이 잠드네. 잠옷을 입을 때 내 입술은 쪼글쪼글하지.
주름 속에 접힌 것들이 펄렁한 잠옷을 부풀게 해. 풍만하지만 당신을 안으면 쉽게 꺼지네. 노파처럼
목소리도 잘게 구겨지지. 당신을 주름 속에 가둬야겠어. 자동차도 넣어줄께. 차는 한 대뿐이니까 맘껏 밟아도 좋지. 기분이 좋지.
소리를 지르라구. 끝은 없었네. 당신 어깨를 적시는 강변의 가로등을 따라 어쩔 수 없이 당신은 몇 번이나 돌아오겠지. 핸들에 머리를 쿵쿵 찧겠지.
당신을 안으면 똑같은 꿈을 세 번 네 번...... 꾸네. 당신은 왜 다른 길로 빠지지 않는 거야? 나는 그때마다 당신에게 파고들었네.
세 번 네 번...... 이빨 없이 잠들지. 노파처럼
찌그러진 해가 뜰 때, 당신 이마로 잇몸 같은 붉은 구름이 흘러드네. 해가 진 적 없는 동쪽 호숫가에서
나는 저녁마다 틀니를 빠뜨리고 아침마다 물풀이 엉겨붙은 틀니를 건지지. 가죽부츠를 신고 핸드백을 흔들며 젊은 여자처럼 또각또각 집을 나오지.
팽팽하게 입술의 양끝을 올리고 웃는,



천국의 아이들 1

아이들은 소음 덩어리지. 어디를 눌러도 삑삑거려. 그러니 아이들 사이로 어떤 소리도 제대로 샐 수가 없지. 여긴 안전해.
나는 우는 아이들을 주워다 키우지.
나는 엄마, 라고 말한 아이에게 묻지.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니? 나는 신기한 듯 아이를 빤히 바라보지.
나는 우유를 주는 여자일 뿐이고, 너희는 울고 있는 미아란다.
너희는 창 밖에 머리 무거운 버드나무도 침대로 끌어들이지. 그건 매일 보는 나무잖니. 너희를 찾으러 온 사람은 없었단다.
너희들은 한 달마다 얼굴이 바뀌지. 반 년이면 너희는 감쪽같아진단다.
마음껏 더럽히렴. 나는 멍청히 우유를 타는 여자일 뿐이고, 너희는 아직 울어도 좋을 때란다. 너희들은 한 덩어리지.
울기 부끄러워지면 나가렴. 너희는 울고 있는 미아란다.



어느 날 갑자기라고 말할 수 없었다

덜덜거리는 개들이 좌판에 벌여 있었다. 개를 파는 사내는 장난치듯 손가락으로 개의 머리를 튕겼다. "이 개들의 가치는 스프링에 있죠."
나는 목을 움츠리며 개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추운 날씨였기 때문에 목을 빼고 싶지 않았다. 어떤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부장은 좀 쉬라고 했지만 나는 목을 좀더 집어넣었을 뿐이다.
나는 머리에 멋진 스프링을 박고 싶다. 전봇대를 들이받고 으으으, 몇 걸음 물러설 때
전봇대보다 높이 머리는 튕겨 오른다. 구름을 뚫을 때, 구름 아래로 쏟아지는 물 세례를 황급히 막으며 검은 우산들 거리를 점령한다. 머리 없는 사람이 비를 맞으며 어떤 진동에 부르릉 감싸여 있다. 그는 정체되어 있었으므로
거리의 흐름에 장애가 되었다. 그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비를 맞는 건 죄악이야."
"누가 저 사람을 좀 치워요."
모두 화를 내고 있었고 싸이렌 싸이렌 싸이렌 소리가 끼어 들고 있었다. 몇 명의 경찰이 그를 끌고 가려 했다. 버팅기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는 또 다른 힘에 연루되어 있을 뿐이었다.
스프링의 힘은 반복이죠. 나는 하강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사건에 대해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이해했는가? 한번 통과했던 전선줄을 다시 통과할 수 없었다.
그는 머리 없이 살 길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의논 끝에 사람들은 그를 깨끗이 치우기로 했다. 거리의 이발사가 그의 늘어난 목을 잘랐다. 간신히 약간의 피가 새어나왔지만 기억에 남길 만한 전율은 없었다. 호주머니 속에 덜덜거리는 개를 집어넣듯이 이제 그는 외투 속에 머리를 쏙 집어넣은 사람 같다.
이제 나는 어딘가로 통하는 몇 가닥의 전화선에 의지하여 노닥거린다. 가끔 친해진 새들이 벌레를 물어다 주곤 한다.





이상한 귀


쇠막대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등뒤에서 아스팔트와 쇠막대와 사내가 이루는 삼각의 각도를 나는 벤치에 앉아 계산했다. 귀의 기능이 지나치게 발달해서 나는 지나쳐야 할 것에 오래 매달리거나,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오해를 샀으며, "도청? 다. 다. 다. 다. 떨어지는 비처럼 고막을 두들기고 간 다음, 정말 내 기분 더러웠다구."
피해를 주었다. 미미한 마찰음 때문이었다. 예상한 대로 남자가 여자의 엉덩이를 문대고 있었다. 당신, 치한이야? 쳐다보는 사람들은 대개 눈을 흘겼다. 뭐? 넌 뭐야? 남자를 화를 냈고 여자는 남자를 잡아끌면서 빨리 내리자고 했으나, 사랑은 왜 치한의 모습을 하는가?
"대체 난 뭔가?" 이런 중얼거림은 유치하다. 나는 귀를 이용해 돈을 벌어야 한다. 쇠막대 끌리는 소리는 사내의 보행 속도와 관련해 무언가 말해준다. 사내는 주식회사 한성 자재창고로 끌려가고 있다.
적극적으로 돈을 벌겠다. 직업적으로 나는 누군가를 미행할 것이며 러브호텔을 출입할 것이며 야비해질 것이다. 정치적인 일에 종사할 수도 있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다만 귀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높여야 한다. 혹시 내가 철로변 자취방에서 빈둥거려도 나는 진로를 모색 중이다.
기차는 세상의 잡음들을 죽이며 지나간다. 이때에 나는 집중적으로 생각한다.



해시계

그림자가 세 시를 덮었으니 나는 그 흐린 이불을 덮고
뒤척였으니 세 시에 들었고
그림자를 따르리 너희들도 그리하니 해가 지기까지
움직이지 않으면 영영 이불을 얻지 못하리 不動하고
엎드린 거지가 손을 높이 쳐드니 그는 헐벗고
동전 대신 햇빛이 딸랑, 떨어지고
그는 눈이 부시니 동정심 때문에 돌아본 너희들은
이불을 덮어도 잠들지 못하리 그림자가 세 시를 덮고
우리가 세 시에 들었으니 세 시에
한 일을 네 시에 옮기고 다섯 시에 옮기고
그림자를 덮을 어둠이 오느니 어둠을 걷을 해가 오기까지
두껍게 덮이리 어둠이 깊다면
학교도 교회당도 종을 치지 않으리


즐거운 식사

벌레 씹는 기분이 아니라 정말 벌레를 씹고 있어요. 내 입은 잔인한 자연입니다.
내게서 풀 냄새를 맡은 적이 있다구요? 히히. 웃을 때 내 이빨이 초록빛으로 반들거리던 걸 기억하시나요?
히히, 내가 욕을 하는 걸 들어 보셨나요? 당신은 발 빼려고 버둥대며 간지럼을 태우는군요.
당신이 나를 웃기는군요. 당신은 끊어질 듯합니다.
질긴 것들은 당신 말고도 많아요. 나는 아주 질긴 여자입니다. 내 신음소리를 들어보셨나요?
내가 씹힐 때 천지는 사방 꽉 다문 입술입니다. 두꺼운 입술을 말아 올리려고 힘을 쓴 적이 있어요. 그러다 천지에 손이 낀 거죠.
나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했지만요, 천지 밖으로 삐져나간 손가락들은 무얼 건드리고 있었을까요? 거기에도 뭔가 잡을 게 있었을까요?
나는 자연으로부터 배웠습니다. 내게서 풀 냄새를 맡은 적이 있다구요?
더러운 개처럼 신발 한 짝을 물고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조금 쉬고 싶어요. 운이 좋으면 천지의 목구멍 속으로 홀딱 넘어갈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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