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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시인과의 만남

언어의 조각사 2009. 9. 22. 19:36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며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 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니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김사인 시인, 대학 교수
출생 - 1956년 3월 30일, 충북 보은군
데뷔 - 1982년 동인지 시와 경제 창간동인 참여
학력 -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
경력 - 2000년 스토리뱅크 편집위원
수상 - 2006년 제14회 대산문학상

깊이 묻다 / 김사인

 

 

 

사람들 가슴에

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노숙/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