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좋은 글 훔쳐보기

기억, 분실하다/ 이정원

언어의 조각사 2007. 7. 3. 09:45

기억, 분실하다

 

- 이정원

 

어느날 잘못 내린, 지하철

2호선 강남역 3번 출구
뭉글뭉글 봄은 빌딩 숲에서도 피어나나
기중기한대 나무등걸에다 가지를 뻗고 있다
호주머니 많이 달린 바지가 좋았던 적이 있었지
5월이면 완공된다는 S사옥의 유리창들이
잘 길들여진 구슬처럼 반짝인다
오라비들이 숨겨두었던 뒷구덩 보물들이 꿈을 실현할 것일까
날마다 기중기에서 싹이 자라고
호주머니 많이 달린 바지를 찾으러
삼삼오오 여자애들은 새새거리며 공중을 떠다녔다
어느 한때는 부품공장 여공이 되는 게 꿈이었던 적도 있었고
미싱사가 되어 옷마다 주머니를 달고 싶어 하기도 했었다
어느 것 하나 이루지 못한 나는
죽도록 사랑하다 버림받는
3류 소설의 여자가 되어
그사내 남기고간 활자를 고르는
지금은 편집증 환자
오피스텔 15층, 내 편집증을 달래주는 젊은 남자
이니셜 박힌 와이셔츠가 풍선처럼 빵빵하다
저러다 터져버리기라도 해서
그 내장 속 이니셜들 다 튀어나오면 어쩌나
HZ.HZ.HZ.HZ.HZ
호주머니를 장만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푸른 잎사귀들이 큭큭큭 웃음을 밀어 넣는다
언제쯤이면 저 기중기에도 열매가 열리나
빛이 반짝이자 한꺼번에 우우우 소리를 내는 유리창들
작년에 떨어진 낙과 한 알
시큼시큼 썩어가는.

 

문득 잘못 왔다는 생각

아니, 처음부터 엇갈렸다는 생각 강남역

3번 출구는 기억 불, 시착 중


'그룹명 > 좋은 글 훔쳐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지막 섹스의 추억/ 최영미   (0) 2009.04.17
김혜순/시.모음  (0) 2008.01.23
서른,잔치는 끝났다 / 최영미  (0) 2007.06.12
빈집-기형도  (0) 2007.06.12
어머니의 편지 / 문정희  (0) 2007.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