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12년 6월 14일
장소 : 광주시문화스포츠 센터
제목 : 저 사람 무우당 같다.
극본,연출 : 김학선
공연장 밖으로 길게 늘어선 관람객들의 기다림으로부터 연극공연은 시작되었다.
“저 사람 무우당 같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손바닥 뒤집기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죽음과 두려움은 삶속에서의 고통과 모든 것들을 포용하거나 혹은 지워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죽음이 비장하거나 무미건조한 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단지 그럴 것이라는 가설에 불과하다. 삶은 늘 꿈꾸는 듯 살아가기도 하며 연극 무대의 한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조연이 되기도 한다.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듯 한 개체로서 무리로서 세상의 외곽을 어슬렁거리거나 또는 중심에 서 있거나 과거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기도 한다.
또 다른 자아를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자아의 어느 한 면을 훔쳐보듯 기억의 한 모서리를 단순화 시키거나 형상화시킨다.
잊혀진 어두운 모습을 자각하거나 하는 일련의 고통들이 연극 속에서, 연극속의 대본을 통해 이탈을 하거나 혹은 그 안에서 꽃을 피우기 위해 하나씩 지워가는 연습을 한다.
삶의 어느 한 페이지에 이르게 되면 대부분 되돌아보기를 하게 된다. 그것은 자아의 성숙을 가져다 줄 수 있지만 때론 그 안에 갇혀 자아를 상실을 할 수도 있다. 극 속에서 과거를 찾아 기억의 실마리를 풀어가면서, 지우고 감추고 혹은 묶어두려고 했던 것들을 무당과 연극 속 배우들을 통해 하나씩 풀어나간다.
회상들은 참 발칙하다. 불쑥 고개를 내밀고 눈깔사탕 쑤욱 내밀듯 달콤하기도 하지만, 지우고 정화해서 안고가거나 애써 묻어버리려고 몸부림친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무대 속 인물이 되어 무대의 한 중심에 서서 과거의 어느 한 시점으로 돌아가 지워버리고 싶은, 내 고통이 마치 그 속으로 투영되듯 그 무대의 한 배우가 되어 과거의 단면들을 캐묻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꽃을 피우기 위해 한 걸음씩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어쩌면 그 곳에서 나 또한 낚싯대를 드리우고 어느 순간의 몸부림치던 과거들을 하나 둘씩 지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시간속의 일부가 되어 보고 싶어서 짧은 여행을 시작한 것 같다.
지우고 싶은 과거가 누구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주연이든 조연으로 그 속에 내가 있었던 것은 개별성의 추억이거나, 혹은 단편의 편린으로서 한 편의 모노드라마에 불과하다.
내가 공연에 끼어들면서 어쩌면 그 무대 속에서 잊고자 했던 과거의 기억들을 다시 생생하게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감추고 있던 과거들이 깨어나 등 돌리고 싶은 또 다른 내 양면성이 과거의 회상들을 하나씩 그리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이란 참으로 우습고 무섭다. 생각하고 싶은 것만 저장하고 나머지 것들은 소각하기 일쑤다 .다분히 휴머니즘 적인 어떤 것을 찾아내기 위함이 아닌, 그 곳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찾아내기 위한 낚싯밥을 던지고 어떻게 낚아챌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리고는 또 다른 의문과 또 다른 기억의 저장고를 열기위해 미로 속을 헤매다가 노을 속으로 이탈을 감행하기도 한다.
참 멋진 공연이었다. 멋진 배우들을 만나 색다른 경험을 맛보게 된 행복한 동행의 기억을 이곳에 풀어 놓는다.
이 연극에서 배우는 곧 무당이다. 과거의 기억을 실제 등장인물들이 배우로 캐스팅되어 연극하는 과정은 죽은 원혼을 불러내 그 사람의 한을 풀어주는 무당의 굿과 흡사하다. 극중 주인공인 홍무가 아버지를 죽이고 오열하며 내뱉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고마워요. 생각나게 해줘서 고마워요." 이는 켜켜이 쌓인 인생의 업보로 응어리진 괴로움을 풀어내는 슬픈 과거사에 대한 인간 공동의 외침이다.
연극은 마약과 같은 환각이다. 이 연극에서의 환각은 연극은 실제 이야기가 아닌 가짜를 현실로 믿게 만드는 환상이라기보다는 고통을 덜어주는 ‘마취제’로서의 기능을 한다.
주인공 홍무는 수몰지구가 되어버린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곳은 애증으로 점철된 사람들과 괴로운 기억들이 함께 묻혀있다. 그는 건널 수 없는 시간의 벽 앞에서, 숨을 고르며 하염없이 깊은 수심 속으로 낚시 줄을 던진다. 기억하기 싫지만 기억해야만 했던, 잊고 싶었지만 잊히지 않던 사람이 그의 낚시 줄에 걸려 올라온다. 낚시를 통해 기억의 무덤에서 나오는 것은 부서지고 부식된 뼛조각 뿐 이다. 그 기억의 파편으로 형태를 만들면서 연극은 시작된다.
이 연극의 묘미는 그가 만든 파편의 형태들이 환각과 같은 연극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할 것인가의 의구심과 호기심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연출과정에서 지나치게 몽환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현실과 환상의 구분을 애매하게 한다는 점이다.
지인과 홍무가 ‘지옥의 캬바레’에서 함께 춤추는 장면에서 앙상블의 과장된 액팅에어리어와 너무 큰 음향 때문에 둘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다는 것이다.
홍무가 지인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과정은 환상이기 때문에 몽환적인 분위기는 이해했지만, 스토리 전개에서 몇 개로 겹쳐지는듯해 관객 입장에서는 이해하는데 다소 버겁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홍무의 대본을 가지고 연기를 해야 하는 죽은 사람들이 ‘연극’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홍무가 밀가루를 바닥에 쏟고서 이게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이다. 당연한 듯 “밀가루지” 하자 홍무는 “아닙니다. 마약입니다”라고 말한다.
“이건 밀가루지만 연극 안에서 마약이라고 하면 진짜로 마약이 되는 거여요. 연극은 모든 걸 가능하게 하죠. 상상력으로.” 한다.
모두가 배역에 불만스러워하며 사라지고 난 후에도 홍무는 혼자 남아 밀가루를 들이마시며 절규한다.
이것은 주인공이 얼마나 절실하게 환각을 원하는지를, 깊은 어둠과 처절했던 과거의 기억에서 얼마나 오랜 세월을 몸서리치며 살아왔는지를 공감하게 한다.
수몰지구의 안개와 주인공이 발산하는 환각과 환상을 드라이아이스를 이용해서 안개 자욱한 이미지와 주인공의 혼탁한 의식을 잘 표현해 냈다. 무대의 낡은 나룻배에는 낚싯대가 걸려 있고, 반대편엔 초가집과 평상이 있었다. 이것은 조명이나 배우들의 움직임과 장면 전환이 많은 연극의 특성을 잘 살리기 위함일 것이다. 특히 무대 소품으로 사용된 나무속에 조명을 설치해 홍무가 아버지인 ‘만부’를 찌르고 난 뒤, 가족과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이 가장 행복했었다며 우는 장면에서 조명이 꺼지고 나무만 은은하게 빛나는 광경은 극중 이미지를 아름답게 마무리해주는 예술 그 자체였다. 무대장치는 예술의 한 분야로서 배우의 연기와 스토리 전개를 도와서 관객들의 이해도를 높여준다. 그런 면에서 이 연극은 무대장치 및 연출, 배우의 연기력에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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