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문학의 향기(공부방)

2011년 신춘문예 당선 시

언어의 조각사 2011. 3. 8. 15:45

 

 

오래된 신생

 

- 2011년 신춘문예 당선 시 경향 분석

 

 

유성호(문학평론가)

  

1.

 

2011년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연초의 신문지면을 어김없이 단장하였다. 비록 해마다 치러지는 관성적 행사일지라도, 그 때마다 심한 열병을 치르는 이른바 ‘신춘문예주의자’들의 가슴은 작년 말에도 뜨겁게 설레었을 것이다. 이처럼 잠재적 문인들에게 매혹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 주는 신춘문예는 그래서 연초의 화제가 되기에 족한 문단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신춘문예의 여러 문제점을 들어 폐지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아직도 신인 등용문으로서의 신춘문예가 갖는 순기능은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정말 신춘문예가 폐지된다면, 단언컨대 우리나라 문학 지망생의 숫자는 현저하게 감소할 것이다.

올해에도 신춘문예에 으레 따라붙었던 일종의 ‘모범답안 증후군’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알맞은 길이(촌철살인의 단형이나 장광설의 장형은 기피된다)와 단단하고 흐트러짐 없이 짜여진 시상(난해 시편은 기피된다), 그리고 보편적 상징에 얽매이는 것이 그 공통 경향이다. 그래서 지원자들은 낯선 상징과 언어들보다는, 보편적으로 공유 가능한 상징과 어법을 문학사의 오랜 광맥으로부터 캐낸다. 올해 당선작들도 치열한 도전과 모험보다는, 이러한 고전적 제재와 방법을 택한 결실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신춘문예가 실험성보다는 두루 안정감을 취하고 있는 모범 작품을 뽑는다는 관행을 지원자들이 의식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당선작들은, 처음 읽었을 때는 전혀 새롭지 않다가, 몇 번 곱새겨 읽었을 때 의구심이 사라지는 경로를 밟게 된다.

이 글에서는 올해 신춘문예 당선작 아홉 편의 경향을 살피기로 한다. 이 시편들은 모두 『2011 신춘문예 당선시집』(문학세계사, 2011)에 실려 있다. 물론 이 책에 실리지 못한 당선작도 있을 테지만, 이 글은 문학세계사에서 오랫동안 이 단행본을 펴내 왔다는 권위에 의지하려고 한다. 당선작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겠는데, 인물의 구체적 삶과 내력에 주목하는 시편들이 한 축에 있고, 특정한 사물의 이미지에 자신의 관념이나 경험을 실어 들려주는 방식의 시편들이 다른 한 축에 놓여 있다. 여기서는 이들에 대한 세세한 해석이나 평가보다는, 전체 경향에 대한 자유로운 조감(鳥瞰)을 수행하려 한다.

 

 

2.

 

먼저 인물의 구체적 삶과 내력에 주목하는 시편들이 취하고 있는 일차적 범주는 ‘가족’이다. 가족의 삶이란 누구에게나 가장 깊은 기억의 뿌리이자, 시간을 가장 직접적으로 거슬러오를 수 있는 일차적 대상이 아니겠는가. 이 때 ‘기억’은 과거 지향의 퇴영적 행위가 아니라, 그동안 지나온 시간들을 가장 원초적인 경험의 형식으로 복원하면서 그것을 현재의 삶과 연루하고 매개하는 적극적 행위로 몸을 바꾼다. 정창준(경향신문)과 홍문숙(세계일보)의 시편이 이에 해당할 것인데, 그중에서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화법을 인용했다는 주(註)가 붙은 정창준 시편을 보자.

 

알아요. 저 모든 것들은 우리를 소각燒却하고 밀어내기 위한 거라는 걸. 네 아버지는 아닐 거다. 네 아버지의 젖은 몸이 탈 수는 없을 테니. 네 아버지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횃불처럼 기름에 스스로를 적시며 살아오셨던 거예요. 아, 휘발성揮發性의 아버지, 집을 지키기 위한 단 한 번의 발화發火.




- 정창준, 「아버지의 발화점」 중 -

 

선행 시편은 기형도의 「위험한 가계・1969」일 것이다. 유년의 가난을 온몸으로 기억해 내는 화자의 어조와 주요한 인물 설정이 꽤 닮아 있다. ‘바람’과 ‘기름 냄새’, ‘김장’과 ‘배추값’과 ‘약’의 세목도 줄지어서 이 선행 시편의 흔적을 증언한다. 하지만 ‘아파트’와 ‘망루’로 세목이 옮겨가면서 이 시편은 조세희 소설과 적극 접속한다. 그럼으로써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는 허름한 세입자의 언어가 시편의 전체적 분위기와 전언을 감싸게 만든다. 남루하고 불안한 공기 속에서 짓이겨진 목소리는, 낮은 곳에서 망루에 올라 자신을 던진 조세희 주인공과 고스란히 겹친다. 화자는 ‘집’을 찾아나선 아버지가 자신을 소진하는 휘발의 순간을 잡아채어 그것을 마지막 “단 한 번의 발화”로 기억함으로써, 아버지의 행위에 보편성을 부여한다. 시단에 모처럼 구체적 “생활 감각을 가진 시”(「심사평」)가 나타나서, 앞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견문록”(「당선소감」)이 씌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한다.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 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 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 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 홍문숙, 「파밭」 중 -

 

‘파밭’은 화자가 기억하는 삶의 은유다. 비 내리는 어둡고 침침한 오후의 파밭, 그렇게 어리석은 비 내리는 파밭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삶의 어둠과 어리석음을 용서받기에 좋은 곳이다. 그 어리석음과 용서의 공존이 화자가 파밭을 기억 속에서 끌어온 이유가 된다. 어머니도 젊어서 파밭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 주시곤 했다는 기억을 화자가 떠올리는 순간, 서러움도 우울도 어머니의 흔적처럼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는 묘사야말로 ‘파밭’에서 수행한 이러한 기억의 치유 과정일 것이다. 이 상상적 과정을 화자는 ‘나비’의 유영을 통해 수행하고 있다. 시인 스스로 “세월의 미시성을 강의 깊이로 흐르다가 문득 마주치는 어머니와도 같은”(「당선소감」) 유산을 얻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시인은 “요즘의 유행과도 한 발 떨어져 있는”(「심사평」) 정통 언어를 통해 자신의 아팠던 내력과 화해하고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적 대상으로 어머니를 불러온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족’은 아니어도 사람살이의 내력을 담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강은진(문화일보)과 권민경(동아일보)의 시편이 여기 해당한다.

 

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 왔다가 가고

 

저렇게 맨얼굴로 누워 눈만 움직이는 동안

 

내 등은 무화과 속처럼 익어 가겠지만

 

그 때도 살짝 웃는 눈썹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이 검어질수록 더 발랄해지는 눈썹이었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의 바다에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가져야 하리

 

눈물나도록 푸른 염료에 상큼하게 물들어야 하리

 


- 강은진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중 -

 

할머니의 짓무른 등과는 달리 할머니의 눈썹 문신은 결코 썩지 않는다. 오래 전 유행했을 딥블루시 컬러의 “푸르스름한 눈썹” 문신은, 변색도 없이 이상적으로 꺾여 있다. 그 견고한 문신의 각도를 두고 화자는, 자신도 언젠가 스스로 돌아눕지 못하는 날이 오면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거나 “목에 박힌 관”으로 바람의 리듬을 연습하거나 문신을 새김으로써 눈썹을 견고케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상상한다. 할머니가 누워 눈만 움직이는 순간, 꽃의 시절처럼 오고가는 반복적인 시간 속에서, 더욱 발랄해질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꿈꾸는 것이다. 비록 할머니의 내력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이 시편은 할머니의 상황과 겹치면서도 상큼하게 펄떡이는 생의 의지를 동반함으로써 새로운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것이 시인으로 하여금 “결국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은 시의 진심”(「당선소감」)이라는 고백을 하게 만들고, 이 시편으로 하여금 “삶의 건강한 구체에서 꽃핀”(「심사평」) 결실이 되게 한 것이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오르는 몸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 권민경, 「오늘의 운세」 중 -

 

이 작품에 나타나는 삶의 내력은 자신의 것이다. 어제까지 살아 있던(어제까지 죽어 있던) ‘나’는 오늘부터 삶이 시작된다. 어제까지 살아 있던 것과 죽어 있던 것은, ‘오늘’로부터의 삶에 의하여 어느새 등가가 된다. 그렇다면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비밀이 바로 “오늘의 운세”다. 화자는 무덤과 끊어진 길과 돌아오지 않을 숲과 흔들리는 수많은 손바닥을 통해, “오늘의 얼굴”과 “어제의 꼬리”를 이으면서 ‘잎사귀점’과 ‘소용돌이치는 예언’ 그리고 ‘운명선’과 ‘각자의 태몽’을 연쇄적으로 불러온다. 이러한 주술적이고 제의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새로이 시작되는 신생의 의지를 산뜻하게 표현한 것이다. 얼핏 상투적인 생의 의지로 번져 갈 수 있는 시상을 단단하고 개연성 있게 구성해 간 공력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그녀 스스로 “시인은 예언의 지점을 가져야”(「당선소감」) 한다고 했던가. 이 작품은 그러한 “생의 아이러니를 포착하는 방식”(「심사평」)을 잘 보여준 실례일 것이다.

 

 

3.

 

또 다른 편에는 매우 고전적인 상징 체계를 빌려와 자신의 관념과 경험을 노래하는 방식의 시편들이 존재한다. 가령 ‘새’와 ‘나무’를 다룬 경우가 있는데, 강정애(서울신문), 박송이(한국일보), 김후인(부산일보)의 시편이 해당한다.

 

그늘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의 혓바닥들만 부스럭거릴 것이다

 

 

 

모두 그늘을 접는 계절

 

간혹, 지붕 없는 새의 빈집과

 

느슨한 바람들만 붙어 흔들리다 간다

 

한 그루 단풍나무가 제 가슴팍에 부리를 묻고 있는 저녁

 

후드득, 바닥에 떨어지는 나무의 귀

 

누군가 새들의 신발을 주워 책갈피에 넣는다.

 


- 강정애, 「새장」 중 -

 

이 시편은 단풍나무 낙엽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누군가 한 번쯤 신었던 흔적과 구겨진 울음 소리 그리고 붉은 온도를 상상하는 과정으로 시작된다. 단풍나무는 저녁노을이 모여드는 새장으로 은유되는데, 새들이 새장에 들어 있는 저녁에는 공중의 거처가 소란스럽고, 바람이 불면 새들은 발자국을 떨어뜨리고 모든 소리를 비운 채 날아간다. 이러한 과정을 눈부시게 담고 있는 자연의 새장 앞에서 화자는, 그늘이 사라진 자리에 남을 새의 혓바닥을 선명하게 상상한다. 그렇게 한 그루 새장이 제 가슴팍에 부리를 묻고 있는 저녁, 나무의 귀가 떨어져 누군가 새들의 신발을 주워 책갈피에 넣는 장면을 상상하는 시인의 품은 아름답다. 이는 ‘나무’와 ‘새’의 교호와 결속을 통해 존재론적 결핍과 충일을 상상적으로 형상화한 가편으로서, 시인은 “시는 왜 굳이 나에게 찾아와 단추가 되려 했는지 의문이 드는 날들”(「당선소감」)을 이어오다 이처럼 “생각과 언어의 결이 살아 있는 시”(「심사평」)를 쓴 것이다.

 

새들은

 

위로 위로

 

날아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들의 발자국에게 미안했다

 

 

 

 

미끄럼틀을 타는 동안

 

우리의 컬러링을 끝까지 듣는 동안

 

알몸이

 

둥글게 둥글게

 

아침을 입는 동안

 

 

 

 

우리의 놀이터에

 

정작 우리만 있다


- 박송이, 「새는 없다」 중 -

 

이 작품 역시 생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를 품고 있다. 창을 통과해 온 겨울 햇살과, 창의 안팎을 통과하는 새들의 발자국은 닮아 있다. 오로지 난간과 낭떠러지의 삶이었던 지난날, ‘바람’과 ‘낙엽’과 추운 ‘알몸’의 시간이었을 지난날, ‘우리’라는 복수 일인칭 화자는 “유일한 우리의 점”을 차례차례 완성한다. 이 때 화자가 ‘나’가 아니라 ‘우리’인 것이 이 시편을 읽는 포인트 가운데 하나다. 가령 ‘우리’의 책장에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지만, ‘우리’가 읽은 구절에는 누군가 똑같은 색깔로 밑줄을 그었고, 그 때 새들은 위로 날아 ‘우리’는 결코 새들의 발자국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새는 없고 ‘우리’만 남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의 원리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사랑해 왔던 모든 사랑을 되찾는 작업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마주할 모든 사랑을 준비하는 과정”(「당선소감」)일 것이다. 온통 “새의 존재와 상징성에 대한 통찰”(「심사평」)로 채워진 가편이다.

 

문을 세웠더니 바깥이 들어와

 

빈 방이 되었다

 

바람의 어느 층이 키운 나무들은 흰 연기를 품고 있다

 

어제는 나무의 안쪽이 자라고 오늘

 

나무의 바깥이 자랐다

 

 

 

나무는 어디가 문일까

 

 

 

문을 열어 놓은 나무들마다

 

초록의 연기가

 

다 빠져나가고 있다


- 김후인, 「나무의 문」 중 -

 

‘바람’과 ‘장마’와 ‘연기’가 접혀 있는 곳에서 화자는 ‘발아’라는 말 옆에 씨앗을 묻어 둔다. ‘발아’나 ‘씨앗’이라는 말에는 “최초의 울음”이 숨어 있다. 그렇게 나무에 걸린 바람을 들여놓고 싶어 방을 하나 마련한 화자는, 물기를 머금고 사는 것들로 방 안을 채울 것을 아름답게 상상한다. 이 때 나무는 ‘방’이자 ‘거처’다. ‘최초의 울음’으로부터 이어져 왔을 “울음의 족보”를 살피면서 화자는 나무의 문을 통해 빈 방을 마련한다. 그 때 “어제는 나무의 안쪽이 자라고 오늘/나무의 바깥이 자랐다”는 고백과 함께, 문을 열어 놓은 나무들마다 초록의 연기가 빠져나가고 있음을 화자는 바라본다. ‘나무’를 통해 삶의 은유를 수행한 시인은 이렇게 “단단하고 치밀한 문맥, 팽팽한 거리두기”(「당선소감」)를 통해 산뜻하고도 단단한 실존적 표지(標識) 하나를 일군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이고 심미적인 시선을 지닌 시인을 두고 우리는 궁극적으로 “따뜻한 아랫목 같은 문장 하나 남을 것”(「심사평」)을 기대한다.

‘새’나 ‘나무’처럼 이미 검증된 상징 가운데 ‘사막’과 ‘얼음’도 있다. 각각 박현웅(중앙일보)과 신철규(조선일보)의 시편이 이에 해당한다.

 

작고 빛나는 사막 한 마리가 죽어 있다

 

바람이 만들어 놓는 칼날, 서서히 날이 서가는

 

죽음의 속도보다 느리게 생명을 쓰러뜨린다.

 

여우의 몸을 떠난 숨결이 오래

 

은빛 털을 핥는다.

 

걸음을 내려놓고 날개 없이 은빛 털들이 날아오른다.

 

채색하는 모래바람은 일렁이는 밀밭풍이다

 

사막에서 살찌는 것은 바람뿐이다


- 박현웅, 「사막」 중 -

 

‘사막’은 삶의 간난과 메마름 그리고 실존적 난경(難境)을 오랫동안 비유해 온 제재다. 화자는 이러한 사막에서 공복의 허기를 바라본다. 은빛 털을 세우고 사막을 건너는 몇 마리 신기루는 모래를 벗어나는 일 없이 발목의 높이를 재보는 은빛여우들이다. 그들의 눈과 허기진 소리들을 추적하면서 화자는 “무서운 것은 포식자가 아니라/찾아야 할 작은 먹잇감”이라 말하는데, 이 때 바람이 만들어 놓는 칼날에 ‘은빛여우’는 숨결을 놓아 버리고 서서히 날이 서가는 죽음의 속도보다 생명은 느리게 쓰러진다. 이처럼 불모와 생명의 공존과 비대칭을 ‘사막’을 통해 형상화한 이 시편은 “부풀어 오르기 전 먼저 허물어져 보라고, 소실점에서 기다려 보라고, 변곡점은 거기에 있다고 수없이 스스로 되뇐”(「당선소감」) 시간의 결실인 동시에, “우리 시대의 적막한 내면을 짜임새 있고 간결하게 표현한”(「심사평」) 결실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단단한 사유와 감각이 적절한 대상과 어법을 만나 결속한 결실이다.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 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 신철규, 「유빙流氷」 중 -

 

‘유빙’은 물 위로 떠내려가는 얼음덩이다. 입김과 눈물의 남다른 기능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나’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렇게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가던 중, 그 전능한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의 연인들의 풍경, 곧 서로에게 눈을 뿌리고 뭉쳐 던지는 풍경이 화자에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는 아름다운 상상을 부여한다. 비록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최초의 입맞춤으로는 돌아갈 수 없지 않은가. 그래도 당신과 나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마주하고 있다. 이것이 시인이 증언하는 사랑의 원리일 것이다. 이는 “나의 구원만큼 타인의 구원도 중요함을 깨닫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당선소감」)는 생각의 반영이기도 하다. 앞으로 “인간의 비극적 관계를 미세하게 통찰하는 개성적인 눈”(「심사평」)이 유빙을 따라 진전될 것이다.

 

 

4.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신춘문예라는 연례적 관행은 그해의 흐름을 적시하는 데는 미흡한 한계를 안고 있다. 지원자들은 자신의 독자적 미학을 소신껏 펼치기보다는 일종의 모범답안을 만들어 심사위원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기획을 하고, 당선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새로운 미적 좌표를 세워 가기 때문이다. 모범생들을 통해 학교 현실을 진단할 수 없듯이,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통해 한 시대의 저류(底流)를 들여다볼 수는 없는 것이다.

신춘문예는 기성 문단으로 나오기 직전, 고백과 은폐를 동시에 수행하는 제의적 속성을 지닌다. 이러한 한계를 감안하면서 우리가 살핀 올해 당선작들은, 예년의 것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오래된 제재와 방법으로 참신성보다는 완결성을 위주로 창작되었다. 그야말로 ‘오래된 신생’의 결실인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신춘문예의 부정적 징후에 대한 부분적 우려일 뿐, 신춘문예의 순기능은 여전히 장려되어야 한다.

개개 시편에 대한 팍팍하고 등량적인 독후감을 실어 보았다. 우리가 읽어 온 것처럼 이번 당선작들은 인물의 구체적인 삶과 내력이라는 기억의 범주와 함께, ‘새/나무/사막/얼음’이라는 사물의 이미지들을 줄곧 담고 있었다. 시인들 모두 이 낯익고도 오래된 신생의 과정을 딛고 더욱 정진해 가리라 믿는다. 결국 신인들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그들이 펼쳐 갈 가혹한 자기 쇄신 과정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