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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지도
1
자주 지도를 들여다 본다
모든 추억하는 길이 캄캄하고 묵직하다
많은 델 다녔으므로, 많은 걸 본 셈이다
지도를 펴놓고 얼굴을 씻고,
머리 속을 헹구워 낸다
아는 사람도, 마주칠 사람도 없지만
그 길에 화산재처럼 내려 쌓인다
토실토실한 산맥을 넘으며,
온 몸이 다 젖게 강을 첨벙이다
고요한 숲길에 천막을 친다
지도 위에 맨발을 올려보고 나서도
차마 지도를 접지 못해 마음에 베껴두고 잔다
여러 번 짐을 쌌으므로 여러 번 돌아오지 않은 셈이다
여러 번 등 돌렸으므로 많은 걸 버린 셈이다
그 죄로 손금 위에 얼굴을 묻고
여러 번 운 적이 있다
2
깊은 밤, 나는
그가 물을 틀어 놓고
우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울음소리는 물에 섞이지 않았지만
그가 떠내려보낸 울음은
돌이 되어 잘 살 거라 믿었다
장도열차
- 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긴 시간 동안 열차를 타야한다. 그래서 그들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친척들을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열차가 쉬어 가는 역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면서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이번 어느 가을날,
저는 열차를 타고
당신이 사는 델 지나친다고
편지를 띄웠습니다
5시 59분에 도착했다가
6시 14분에 발차합니다
하지만 플랫홈에 나오지 않았더군요
당신을 찾느라 차창 밖으로 목을 뺀 십오분 사이
겨울이 왔고
가을은 저물대로 저물어
지상의 바닥까지 어둑어둑했습니다
누(累)
늦은 밤 쓰레기를 뒤지던 사람과 마주친 적 있다
그의 손은 비닐을 뒤적이다 멈추었지만
그의 몸 뒤편에 밝은 불빛이 비쳐들었으므로
아뿔싸 그이 허기에 들킨 건 나였다
살기가 그의 눈을 빛나게 했는지 모르겠으나
환히 웃으며 들킨 건 나라고 뒷걸음질쳤다
사랑을 하러 가는 눈과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늦은 밤 빨랫감을 털고 있는 내 방 창문을 지나
막다른 골목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숫그림자는
구두 굽에 잔뜩 실은 욕정을 들키자
번득이는 눈으로 달겨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럴 땐 눈이 눈에게 말을 걸면 안 되는 심사인데도
자꾸 아는 척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내 눈은 오래도록 그 눈들을 따라가고 있다
또 한 번 세상에 신세를 지고야 말았다 싶게
깊은 밤 쓰레기 자루를 뒤지던 눈과
사랑을 하러 가는 눈과 마주친 적 있다
밤 열두 시
1
밤 열두 시는
떡복이 1/2인분과 순대 1/2인분이다
그것도 다 식은 채로
한 접시에 나란히 나오는 것이다
순대는 고추장에 닿지 않으려고
한사코 한쪽을 지키고 있고
떡볶이는 순대 쪽으로 진물을 흘리고 있다
순대 먼저 먹을지
떡볶이 먼저 먹을지
밤 열두 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
2
밤 열두 시는
밥 한 공기를 시켜
당신과 내가 나눠 먹는 일이다
그러다 밥 속에서 눈썹이 나오면 눈섭을 떠내어
몰래 식탁 밑으로 숨기는 일이다
당신의 숟가락이 지나간 자리엔
붉게 수술자국 생겨나고
사과나무 하나 뽑혀나간 것 같은 구덩이는
두 사람이 걸어온 밤길처럼 메꿀 길이 없다
반찬 묻은 족을 먹어야 할지
안 묻은 쪽을 먹어야 할지
밤 열두 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
이사
이삿짐을 싸다 말고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다 보니
그냥 두고 갈 뻔한 고추 몇 대
미안한 마음에 손을 내미니
빨갛게 매달린 고추가
괜찮다는 듯 떨어진다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으면
모른 체 데려가 주지 않을 생(生)
새벽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을 찌르는 매운 물기
좋은 사람들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비좁다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적다 하지만 햇빛은 좁은 곳 위에서 가루가 될 줄 안다 궂은 날이 걷히면 은종이 위에다 빨래를 펴 널고 햇빛이 뒤척이는 마당에 나가 반듯하게 누워도 좋으리라 담장 밖으론 밤낮 없는 시선들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바쁘고 개미들의 행렬에 내 몇 평의 땅에 골짜기가 생기도록 상상한다 남의 이사에 관심을 가진 건 폐허를 돌보는 일처럼 고마운 희망일까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메이게 아름답다 적과 내가 엉기어 층계가 되고 창문을 마주 낼 수 없듯이 기운 찬 사람을 만나는 일이란 따뜻한 숲에 갇혀 황홀하게 밤을 지새는 일 (지금은 적잖이 열망을 끼얹거나 식히면서 살 줄도 알지만 예전의 나는 사람들 안에 갇혀 지내기를 희망했다) 먼 훗날, 기억한다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내던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이라고 내가 물이고 싶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노을이 향기로운 기척을 데려오고 있다 땅이 세상 위로 내려앉듯 녹말기 짙은 바람이 불 것이다
그날엔
갖고 싶은 것 다 가지고 사는 사람 있는가 내 어머니의 연탄구멍 같은 교훈이 석유난로 위에서 김을 낸다 오랜만에 숭늉이 끓는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딸을 두고 일찍 재가하셨고 세상에서 유명한 구멍 속으로 발을 들여놓으셨다 구멍만을 디디고 이 길까지 오신 어머니는 온통 세상이 혼자뿐인 것 같아 자식 스물을 꿈꾸셨지만 결국은 구멍에다 나를 빠뜨리셨다 한 길 가는 생명이 바람이 내어준 길을 따라 코를 열고 바빠할 때 난 듣는다 또 숭늉 끓이는 소리와 탄식은 탄식을 낳는다는 소리를
어머니는 살아 계시지만 그 말을 어머니의 살아 계시는 유언이라 믿는다 세상의 문이 고쳐져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까지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살지 못한다 나는 영영 태어나지 않을 부자가 되어 무섭게 떠돈다 땅이 사람 가슴 안에서 얼마나 여러 번 쪼개어지는가를 본다 어머니가 내 자식을 연인처럼 사랑하다 들킨 듯 웃으시는 걸 본다 그날엔
고욤나무
폭포 내려오는 길에 거대한 나무 하나 넘어져 있다
오르는 길에는 보지 못했는데 내려오는 길에 본다
아마도 어젯밤 일이었을 것이다 하도 오랜만에 비 내려 그 비를 반가워하다 발을 접질렀을 것이다
밑동이 한 바퀴 휜 것을 보니 어느 쪽으로 넘어질 것인가를 고민했던 상체의 흔적이 역력하다 사람 오르내리는 길 모른 체하고 개울 쪽으로 누워 스스로 집이며 몸이며 經인 사랑을 염하고 있다
밑둥치에서 놀던 벌레들은 얼마나 놀랬을꼬 얼마를 놀라 얼마를 기어 달아났을꼬 넘어지는 큰 나무를 몇 개 가지로 받아내던 이웃 나무는 가지를 잃고 얼매나 흔들렸을꼬
어루만져주고 싶어 명치가 어디께인지를 더듬다 뽑혀나간 손톱을 본다 사력을 다해 허공이라도 잡으려 뻗었다가 빠졌을 손톱 소리 쟁쟁하다
폭포 내려오는 길에 넘어진 큰 나무가 개울물에 배를 띄우고 있다
거인고래
거인고래는 크지 않습니다
왼 눈은 감정 있는 것을 보고
오른 눈은 죽어 있는 것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상처가 생기면 상처 된 자리를 스스로 떼어내 번지지 않게 하며
백 오십년을 살 뿐 오래 살지 않습니다
그 일생의 한번 나의 천막에 들른다 하였습니다
밤은 어둡고 꽃들은 서로를 모른 체 하는 사이
나는 그의 눈을 받아먹고 고양이 되고 얼음이 되고 눈발이 되려
질척이며 그가 오는 소리를 향하여 몸 돌리려 하였습니다
헌데 거인고래는 살아오지 않는 존재라 하였습니다
기다리는 일은 구실이며 병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설레는 일 없도록 다 내려놓아야겠는데
팔뚝에 불을 질러 연기를 피우는 천막 밖의 저 큰 나무
큰 나무 아래 몸에서 몸위로 까무러치는 수천의 달(月)들
혹 내가 터를 옮길 적마다 서 있던 저 나무 한그루가 거인고래는 아니었는지요
그것으로 다녀간 것으로 치자는 셈은 아닌지요
거인고래가 다녀가고 나와 내 생각의 풍경들은 마지막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스미다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
울진에 도착하니 밥냄새와 나란히 해가 뜨고
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
해변 식당에서 아침밥 시켜 먹으며
찌개냄비에서 생선뼈를 건져내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치솟는 것은 무슨 설움 때문일까
탕이 매워서 그래요? 식당 주인이 묻지만
눈가에 휴지를 대고 후룩후룩 국물을 떠먹다
대답 대신 소주 한 병을 시킨 건 다 설움이 매워서다
바닷가 여관에서 몇 시간을 자고
얼굴에 내려앉는 붉은 기운에 창을 여니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내 눈알은 저만한 솜씨도 못 되어서 늘 찔끔하고 마는데
그가 올라앉은 뱃전을 적시던 물기가
내가 올라와 있는 이층 방까지 스며들고 있다
한 몇 달쯤 흠뻑 앉아 있지 않고
자전거를 끌고 돌아가는 사내의 집채만한 그림자가
찬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고 있다
바람의 사생활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봉인된 지도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
달이 커보였던 때
일년은 팔백일이었고 하루는 열한 시간이었을 때
덫을 놓아 잡은 짐승을 질질 끌고 가는 당신,
당신이 낸 길을 없애려 눈은 내려 덮이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얼어붙은 날이 있었다
다시 얼음 녹으면서 세상은 잠시 슬퍼지고
그 익명의 밤은 다시 강처럼 얼고
언 밤 저편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듯 강가에 모여 불을 피우자
밤 이편의 사람들도 강 건너를 걱정하느라 불을 피웠다
그 어두운 밤 서로를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당신은 그만 손가락을 잘랐다
지구와 달의 자리가 가까워 달이 커보였던 때
일년은 오백일이었고 하루는 열여섯 시간이었을 때
당신은 나를 데리러 왔다
신(神)과의 약속 발설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
지금 그 시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백스물 아흔 여든두 살 쭈글쭈글한 얼굴로 돌아가자 말했다
허나 내가 지켜야할 약속은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
달과 지구의 자리가 멀어져 달이 작아 보일 때까지
일년은 삼백육십오일이고 하루는 스물네 시간일 때까지
겹
나에겐 쉰 넘은 형이 하나 있다
그가 사촌인지 육촌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모른다
태백 어디쯤에서, 봉화 어디쯤에서 돌아갈 차비가 없다며
돈을 부치라고 하면 나에게 돌아오지도 않을 형에게
삼만 원도 부치고 오만 원도 부친다
돌아와서도 나에게 전화 한통 하지 않는 형에게
또 아주 먼 곳에서 돈이 떨어졌다며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는 그가 관계인지 높이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잘 모른다
단지 그가 더 멀리 먼 곳으로 갔으면 하고 바랄 뿐
그래서 오만 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고
십만 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고
그의 갈라진 말소리에 대답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어느 먼 바닷가에서 행려병자 되어 있다고
누군가 연락해왔을 땐 그의 낡은 지갑 속에
내 전화번호 적힌 오래된 종이가 있더라는 것
종이 뒤에는 내게서 받은 돈과 날짜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더라는 것
어수룩하게 그를 데리러 가는 나는 도착하지도 않아
그에게 종아리이거나 두툼한 옷이거나
그도 아니면 겹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할 뿐
어디 더 더 먼 곳에서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했으면 하고
자꾸 바라고 또 바랄 뿐
절연
어딘가를 향하는 내 눈을 믿지 마오
흘기는 눈이더라도 마음 아파 마오
나는 앞을 보지 못하므로 뒤를 볼 수도 없으니
당신도 전생엔 그러하였으므로
내 눈은 폭포만 보나니
믿고 의지하는 것이 소리이긴 하나
손끝으로 글자를 알기는 하나
점이어서 비참하다는 것
묶지 않은 채로 꿰맨 것이 마음이려니
잘못 얼어 밉게 녹는 것이 마음이리니
눈 감아도 보이고 눈을 감지 않아도 보이는 것은
한 번 보았기 때문
심장에 담았기 때문
눈에 서리가 내려도 시리지 않으며
송곳으로 찔러도 보이지 않는 것은
볼 걸 다 보아 눈을 어디다 묻었다는 것
지독히 전생을 사랑한 이들이
다음 생에 앞을 못 본다 믿으니
그렇게라도 영혼을 씻어야 다음 생은 괜찮아진다 믿나니
많이 오해함으로써 아름다우니
딱하다 안타깝다 마오
한 식경쯤이라도 눈을 뜨고 봐야 삶은 그저 진할 뿐
그저 나는 나대로 살 터 당신은 당신대로 잘 살기를
내 눈이 허락하는 반경 내에서 연(緣)은 단지 그뿐
생의 절반
한 사람을 잊는 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이 사는 데 육십 년이 걸린다 치면
이 생에선 해야 할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되나니
당신이 살다간 옷들과 신발들과
이불 따위를 다 태웠건만
당신의 머리칼이 싹을 틔우더니
한 며칠 꽃망울을 맺다가 죽은 걸 보면
앞으로 한 삼십 년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 데
꼬박 삼십 년이 걸린 셈
이러저러 한 생의 절반은 홍수이거나 쑥대밭일진대
남은 삼십 년 그 세월 동안
넋 놓고 앉아만 있을 몸뚱어리는
싹 틔우지도 꽃망울을 맺지도 못하고
마디 곱은 손발이나 주무를 터
컴컴한 얼룩 하나 만들고 지우는 일이 한 생의 일일 터
나머지 절반에 죽을 것처럼 도착하더라도
있는 힘을 다해 지지는 마오
전갈(傳喝)
겨우 남긴 몇천원으로는 택시를 탈 수 없겠다 싶어
서둘러 술자리를 벗어나
다급한 형편 되어 전철역을 찾는다
먹물 같은 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밤
을지로 3가 지하도에 들어서니 이불이며 상자조각들을 펴던
부랑인 가운데 한 사내가
긴 지하도 저편에 대고 외치고 있다
ㅡ거기 시청 앞 용식이 아침에 밥 먹으로 3가로 오라고 해. 꼭
그 말을 받은 2가의 부랑인이
1가쪽을 향해 소리치니 메아리가 메아리를 끌어안는다
ㅡ거기 시청 앞 용식이 아침에 밥 먹으러 3가로 오래
아쉽게도 꼭이란 말은 생략되었으나
1가의 부랑인은 시청 지하도 쪽으로 목청을 높이며
꼭이란 말을 보탰을 것이다
지하도가 굽은 길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한밤
표를 끊을새 없이 겨우 몸을 실은 마지막 전철에서
먼 곳으로부터 메아리를 싣고 달려왔을
바퀴들의 수고가 고마워
나도 모르게 숨이 가지런해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누군가를 불러
따뜻한 국밥 두 그릇 시켜 천천히 먹자 하고
나도 나에게 전갈을 보낸 뒤에
길고도 아름다운 메아리가 도착한 종점 즈음에다
자리를 봐야겠다
찬란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서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음력 삼월의 눈
한 사람과 너는
며칠 간격으로 떠났다
마비였다,
심장이라는 계절의 마비
때 아닌 눈발이 쏟아졌고
눈발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길가에서 더러워졌다
널어놓은 양말은 비틀어졌으며
생활은 모든 비밀번호를 잃어버렸다
불 옆에 있어도 어두워졌다
재를 주워 먹어서 헛헛하였다
얻어온 지난 철의 과일은 할 일이 없어도
궁극적으로 익어갈 것인데
두 사람의 심장이 멈추었다는데
눈보라가 친다
잘 살고 있으므로 나는 충분히 실패한 것이다
사무치는 것은 봄으로 온다
너는 그렇게만 알아라
탄식에게
네가, 내 간을 뜯어가듯 조금이었음 한다
이빨의 기운을 믿어 나를 물고 내 속을 후려치지 않았음 한다
삼라만상이 내 말을 믿었음 한다
잘못했으니 다 내 잘못이었으니, 산 늪에 몸을 들여 늪이 다 마르고 말라 몸 갈라지면, 모래가루 복받쳐 나오는 내 심장을 벌려 얼굴을 묻은 채로 안 볼 터이니
한 장의 이파리처럼 뒤집히는 이 소요, 아주 가끔이었음 한다
우리는 스무 살에 시를 쓰기 위해 집 하나를 빌렸다
그토록 많은 계단을 올랐다니
그토록 막막한 높이에 우리가 감금되었다니
믿어지지 않네요
1
내가 시름을 데리고 들어간 움막에
너는 약을 준비해놓고 잘 자라 했고
밤새 망쳐놓은 흰 종이들을 모아다
너는 그 무늬들을 외웠고
먼 길에서 지쳐 돌아오면 매운 것들을 차려
문 밖에 걸어두었고
자살한 친구 생각날 때, 눈감을 수 있게
한데로 나가주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지만
영영 흩어져 돌아오지 않았지만
남겨두고 간 신발들을 나, 달래주지 못했고
2
그리고, 정전
방 안의 모든 수평을 더듬어
너희가 태우다 말았을 심지에 불을 붙인다
팽팽한 어둠이 창 너머에서 빨려들어오고
어둠 한쪽 구석, 너희가 떼어버린 미늘창이
불길하게 자릴 바꾸는 모습을 본다
울부짖으며 과거를 누설하는 그을음들이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아웅다웅하던
방의 냄새를 태우고 있다
3
나의 스무 살 연인은 물 밑에 가라앉은 나무,
책갈피 사이에도 구겨넣지 못하는 한 그루 나무,
문 닫아도 밖에 서 있는 타 죽은 나무
시인들
1
나이 먹어서도 사람들 친근하게 못 맞아주더니
못된 놈처럼 자기만 아느라 독기로 밀쳐만 내더니
시인이라고 소개하는 이 앞에선
마음이 열리고 바다가 보인다
술 한잔 오가며
-시인들이 원래 그렇죠, 뭐
낯선 이의 말 같다 싶은 말에
편 하나 끌어들인 기분 되어
진탕 마시고 마시다가 바다 앞에 선다
-우리 잘하고 있는 거지?
처음 본 사인데 말까지 놓으면서
길에 핀 꽃대를 걷어차면서도 히히덕거리는
시인들의 저녁식사
유난히 쓸쓸해져 걸어 돌아오면 빈집 가득한 바람
누군가 왔다 갔나 킁킁거리면
늦은 밤 택시 타면서 밤길 잘 가라고 손 흔들던 시인
언제 들렀다 간 건지 바다 소리 들리고
무릎까지 들어온 갈대밭에 발자국이 찍혀 있다
2
어찌 사는가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쌀은 안 떨어졌는가
살면서 시인에게만 들었던 말
나도 따라 시인에게만 묻고 싶은 말
부모도 형제도 아닌 시인에게만 묻고
한사코 답 듣고픈 말
어찌할 것도 아닌데
지갑이 두둑해서도 아닌데
그냥 물어서 괜찮아지고 속이 아무는 말
옛 애인을 만나러 가다 말고
시 쓰는 이의 전화를 받고
그 길로 달려가서는 대뜸 묻는 말
어찌 사는가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쌀은 안 떨어졌는가
누(累)
늦은 밤 쓰레기를 뒤지던 사람과 마주친 적 있다
그의 손은 비닐을 뒤적이다 멈추었지만
그의 몸 뒤편에 밝은 불빛이 비쳐들었으므로
아뿔싸 그이 허기에 들킨 건 나였다
살기가 그의 눈을 빛나게 했는지 모르겠으나
환히 웃으며 들킨 건 나라고 뒷걸음질쳤다
사랑을 하러 가는 눈과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늦은 밤 빨랫감을 털고 있는 내 방 창문을 지나
막다른 골목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숫그림자는
구두 굽에 잔뜩 실은 욕정을 들키자
번뜩이는 눈으로 달겨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럴 땐 눈이 눈에게 말을 걸면 안 되는 심사인데도
자꾸 아는 척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내 눈은 오래도록 그 눈들을 따라가고 있다
또 한 번 세상에 신세를 지고야 말았다 싶게
깊은 밤 쓰레기 자루를 뒤지던 눈과
사랑을 하러 가는 눈과 마주친 적 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줄자와 연필이 놓여 있는 거리
그 거리에 바람이 오면 경계가 서고
묵직한 잡지 귀퉁이와 주전자 뚜껑 사이
그 사이에 먼지가 앉으면 소식이 되는데
뭐하러 집기를 다 들어내고 마음을 닫는가
전파사와 미장원을 나누는 붉은 벽
그 새로 담쟁이 넝쿨이 오르면 알몸의 고양이가 울고
디스켓과 리모콘의 한 자 안 되는
그 길에 선을 그으면 아이들이 뛰어 노는데
뭣 때문에 빛도 들어오지 않는 마음에다
돌을 져 나르는가
빈집과 새로 이사한 집 가운데 난 길
그 길목에 눈을 뿌리면 발자국이 나고
전봇대와 옥탑방 나란한 키를 따라
비행기가 날면 새들이 내려와 둥지를 돌보건만
무엇하러 일 나갔다 일찌감치 되돌아와
어둔 방 불도 켜지 않고
퉁퉁 눈이 붓도록 울어쌌는가
아물지 못하는 저녁
눈발이 쏟아지는 길을 걸어 식당을 찾아냈다. 아무도 없는 식당 안을 채우고 있는 소란스러운 냄새, 냄비에 뭔가 끓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은 오지 않고 내심 끓고 있는 냄비에만 마음이 쓰였다. 시장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뭔지 모를 그것이 다 졸아 타버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뚜껑을 여니, 두 줄로 포개어져 끓고 있는 두부에 붉은 물이 들고 있었다. 끓으면 넣으리라 생각하고 썰어놓았을 도마 위의 파 한 뿌리. 그것을 내려다보며 주인의 부재를 다시 한번 느낄 즈음엔 이미 파를 냄비 안에 집어넣고 난 후였다. 아, 나도 모르는 사이, 숟가락을 들어 찌개 맛을 보고 있는 나.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주인은 어딜 간 것일까. 객이 냄비를 다 비우고 나서도 오지 않는다면 어쩔 텐가. 물기가 내려앉아 얼기 시작한 창문 밖으로 눈발은 그치질 않고 식당 안으로는 문을 닫아 걸어야할 것만 같은 어둠이 물려들기 시작했다.
무늬들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유리창이 밀리고
그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거워 놀란 감정의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이른 눈사태가 나고
유물항아리 속에서 몇십 갑자를 돌고 도느라 마른 몸으로 도착한 우글우글한 미도微動이며, 그 얼굴에 쫓겼던 또 얼굴, 당신의 얼굴들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여즉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갸륵한 시간임을
한 뼘 몸을 옮기며 나는 간절하였으나
대문 앞에 내 놓은 짐들 위로 가랑비 내리고
박박 긁어모은 돈을 잠시 가슴 안쪽에 품어봤던 날
식초를 쏟았다
언제였나 이 집에 몸을 들인 무슨 이유라도 있었나
생각하고 생각해봐야
하나의 몸으로 와 하나의 몸 이루고 가는 게 고작인데
어찌 더 쓸쓸하라는 것인지 비워야 할 집에 식초를 쏟았다
겨울은 갔어도 여전히 겨울이었다
빈 집 마루에 손을 얹더니 이사한 곳까지 따라와
큰 짐승인 체하며 질컥이는 슬픈 냄새
그 먼 길 그토록 간절히 나를 따라와
내 목덜미 핏자국들을 치우는 고단한 냄새
냄새로 핥아 지우는 것이 내 허물만은 아니어서
서럽고 차가운 벽을 핥아 잇대으니
환해지고 채워진 듯 또 한 생을 펼칠 만도 하였다
나를 묻은 겨울 밤이었으나
달빛이 젖은 껍질 벗어 초 냄새를 덮는 봄 밤이기도 하였다
오래된 사원
나무뿌리가 사원을 감싸고 있다
무서운 기세로 사람다니는 길마저 막았다
뿌리를 하나씩 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원의 벽돌이 하나씩 무너져 내렸다
곧 뿌리 자르는 일을 그만 두었다
오래 걸려 나를 치우고 나면 무엇 먼저 무너져내릴 것인가
나는 그것이 두려워 여태 이 벽돌 한 장을 나에게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한 날 새들이 우는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고 가는 울음 멎게 술 한 잔 부어줄걸 그랬나, 발이 젖어 오래도 멀리도 날지 못하는 새야
지난날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둔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月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며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보아라
견인
올 수 없다 한다
태백산맥 넘는 고갯길, 눈발이 거칠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답신만 되돌아온다
분분한 어둠 속, 저리도 눈은 내리고 차는 마비돼 꼼짝도 않는데 재차 견인해줄 수 없다 한다
산 것들을 모조리 끌어다 죽일 것처럼 쏟아붓는 눈과
눈발보다 더 무섭게 내려앉는 저 불길한 예감들을 끌어다 덮으며
당신도 두려운 건 아닌지 옆얼굴 쳐다볼 수 없다
눈보라를 헤치고 새벽이 되어서야 만항재에 도착한 늙수그레한 레카 기사
안 그래도 이 자리가 아닌가 싶었노라 한다
기억으로는 삼십 년 전 바로 이 자리,
이 고개에 큰길 내면서 수북한 눈더미를 허물어보니
차 안에 남자 여자 끌어안고 죽어 있었다 한다
세상 맨 마지막 고갯길, 폭설의 기억 때문에 부패하지 않았을 사랑도 분명 견인되었을 것이다
진종일 이가 아프다던 당신, 나도 당신 품을 따뜻해하며 나란히 식어갈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