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광규시인과 정희성시인 싸인
얼굴 반찬
-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공광규 '얼굴반찬'(시집 '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2008)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운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에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맷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을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 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과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처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공광규 시집 『 담장을 허물다 』, 《창비》
공광규 시인의 시집 『 담장을 허물다 』를 받고 막막히 떠 있는 별빛을 바라보았다. 어둠속 작은 별빛이 반짝거리는 저 거리를 만지지 못하고 바라본다. 이는 빛나는 시인의 마음도 서로 바라보면 별빛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열정은 매일 하루도 빠짐 없이 어둠속에 나타나 빛을 낼 때 찾아지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니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하늘을 보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 만큼 시인은 스스로 어둠 속에 빛나는 집을 지어야 하는 별인지도 모른다. 담장을 허물고 한 고을의 영주가 되어 세상을 굽어보며, 그 속에 무엇들이 가로 막고 가로 질러 가는지를 보니, 사람 세상에 무엇들이 담장의 둘레 안에 있어는지 잘 들여다 보인다. 담장 하나 허물었을 뿐인데, 세상이 바뀌었다. 사람 마음도그러할 것이다. 아직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 많은 담장이 있다. 그 높이가 자꾸 더 높아진다. 세상 사람은 자기 욕심에 담을 쌓겠지만, 그것을 허무는 일은 가나한 시인의 몫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아무리 높이 담장을 쌓아도 어둠은 밭고랑쯤 여기며 넘나든다. 그러니 사람 세상이 얼마나 보잘것 없이 작은 것에 집착해 사는지, 그 집착을 스스로 허물어 버리는 공광규 시인의 마음이 어둠의 둘레처럼 커 보인다.
공광규 시인님이 선물하신 정희성시인님 친필싸인.
정희성시인님의 수락하에 증정받은 최고의 선물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