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조각사
2012. 11. 22. 17:21
아내의 시집
아내는 어느새 셋방살이 같은 잠에 빠졌네요 가계부에 밥풀처럼 납작 달라붙어서요 의류수거함 대신 아내 차지가 된 제 뜨개옷의 보풀도, 때 넘긴 파마머리도 투정을 거두고 같이 잠들었네요 아내는 쪽잠 속에서도 흥정을 하는지 깎아달라는 잠꼬대가 졸린 눈을 비비네요 저는 생활정보지를 접고 말을 걸어 봅니다
— 마수걸이라 그렇게는 안 돼요 — 그래도 깎아… 주세요
된소리를 발음할 때마다 아내의 눈썹 사이가 구겨져요 아내가 젖몸살을 앓으며 걷던 가계부 속으로 눈길을 피해 봅니다 올 나간 우리 가족을 숫자와 기호로 옮겨 놨네요
— 그럼 그렇게 가져가요, 아가씨
미안함에 선심을 써 봅니다 덤으로 싸 준 아가씨란 말에 에누리 없는 웃음이 켜져요
- 김명호, '아내의 시집' 부분 -
불황이라는 그늘에서 빠듯하게 가계부를 쓰고 있을 아내. 아내의 시집에는 적자의 빨간 글씨가 섞이지 않아서 늘 활짝 웃는 얼굴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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