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 2

그늘의 시간을 보다/김영미

그늘의 시간을 보다/김영미 얕은 산속을 산책하다가 문득 눈이 띈 버섯무리들, 현란함으로 보아 독버섯임에 분명하다 노란빛 혹은 형형의 색채 속에서 독성의 날들을 보낸다는 것 썩거나 죽은 나무의 그늘을 섭취하며 햇살의 반대편을 느린 생애로 버텼을, 내 안의 사랑도 그랬을 것이다 무례한 감정의 방문과 현란한 타협을 요구하는 젊음의 뒤안길에서 나의 사랑도 아픔들 상처들을 보호하기 위해 독성의 은신처를 빌려야 했으리라 사랑은 독이다 아니, 내 안의 느린 시간을 보호하기 위한 썩은 양분들이다 습기 찬 계절 속을 서성인다는 건 얼마나 찬란한 관습이던가 나는 그늘들의 시간을 지우고서 밤의 입구 이슬들이 몰려오는 또 다른 감촉들에게 귀를 적시기 시작한다 2022년 문학청춘 발표작 2022년 착각의 시학 사화집

시작노트 2022.08.30

낡은 풍경에서 깨어나다

낡은 풍경에서 깨어나다/김영미 고택에 든다 쇠락한 시간이 이곳저곳 널브러진 조그마한 안마당이 주춤 기억의 뒤로 숨고 뒤꼍으로 향하는 처마 옆 살구나무만이 노란 인사를 하는 곳 이제 다시는 청빈의 주소를 꿈꾸지 않으리라던 쓸쓸한 독백과 절구 속 봄날의 가난을 눈물로 빻던 곤궁한 푸념들이 되살아나고 어쩌면 이맘때는 아니었을까 내가 논두렁 너머로 곡선의 심부름을 하며 아버지의 막걸리에 취한 그날 오후와 풀잎처럼 지친 몸을 맞이하던 고택의 지조 방금 뒤꼍을 한 바퀴 돌아 나온 바람에도 단추 같은 열매를 몇 개 내줄 것 같은 늙은 감나무 풍경을 상상해 보는 일 고택은 그러나 고택을 꿈꾸지 않는다 낡은 풍경을 복사하지도 않으며 그렇다면 지금 고택이 꿈꾸는 건 정작 무엇일까 맨 처음 자신 속에 주소를 열었던 바로 그..

시작노트 2022.08.13